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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온 Dec 15. 2023

대치동 말고, 한라산 라이딩

 졸업 기념으로 백록담 어때?

너를 기다리는 시간 6시 20분. 너를 만나러 가는 5시 20분부터 데이트 가는 여자로 분했다. 같이 한 곳에서 출발해서 다시 한 곳으로 도착하는 일상과 달리 제3의 장소에서 만남은 심히 두근거렸다. 손 꼭 잡고 데리고 다니던 꼬꼬마가 언제 어디로 나와 하면 알아서 오다니 이건 혁명이다. 우리 약속은 너의 학원 앞, 네 수업을 마치는 이 시간이다. 수업이 끝나자 마자 한성백제역 3번 출구로 오는 거야, 그게 어디냐면 학원에서 나와서 대로를 끼고 좌회전해서 쭉 내려와 지하철 출구가 나올 때까지. 혼자 올 수 있겠지? 지도까지 캡처해서 당부의 당부를 해 놓은 터이다. 녀석의 대답은 그럼 셔틀 타고 첫 번째에 내리면 되겠네. 라고 매우 무심하게 심플. 혹시나 잘 찾아오지 못할까, 엇갈리진 않을까 엄마의 조바심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녀석이 잘 찾아서 제 시간에 올 지 온통 신경이 쓰였다. 다른 엄마들 같으면 아이를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실어 나를 시간에 이래도 되나 싶었다. 한라산 라이딩을 해 주겠다며 차 없는 뚜벅이 엄마는 지하철역 앞으로 아이를 불러냈다.




"중학교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 없어?"

"한라산 가고 싶어"

뭐어, 한라산, 도대체 거길 왜. 한 겨울에 굳이. 지금 아빠가 뭐든 들어 주겠다잖아. 황금같은 찬스를 등산 따위로 날리겠다고. 엄동설한에 하루 종일 산에서 생고생을 네 발로 하러 간다고. 13살짜리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큰 상을 주겠다는데 산에 가겠다니. 그것도 한파에, 우리 나라에서 제일 높고 험한 산을 택해서 말이다.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거듭 물었지만 같은 말이 돌아왔다. 그냥 가고 싶단다. 멋있단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생각할수록 헛 웃음이 나는 소원이었다. 뭐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는 진지했기에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다. 비싼 게임기, 최신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하지 않아서, 멀고도 비싼 값을 치뤄야 하는 해외 여행 가 달라고 하지 않아서 고마웠지만, 이 또한 반갑지가 않고, 마뜩지 않으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사실 큰 아이는 한라산 경력자였다. 영실 코스로 대피소까지 2번, 성판악 코스로 정상까지 1번 올랐던 전적이 있다. 미취학과 초저학년 때로 체력이 지금보다 짱짱했었고, 계절이 좋은 한 여름에 등산화와 배낭 하나 없이 홀홀 단신으로 가뿐하게 놀이 삼아 즐겁게 올랐었다. 힘들다고 칭얼대거나 못 가겠다고 투정 부리지 않고 모두 제 힘으로 완등했던 기특한 아이였다. 이쯤하고 내려가도 된다, 도저히 못 가겠으면 코끼리 열차처럼 생긴 기차를 태워 달라고 해도 된다고 해도 제 갈 길을 가던 녀석이었다. 오히려 찡찡대고 헉헉댔던 건 나였다. 아이가 포기하지 않아서 동반으로 중도 하차할 찬스를 잃어서 괴로웠다. 녀석이 이끄는 대로 녀석의 뒤를 밟아 오르고 또 오르며 결국 정상을 찍고 내려 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나는 한라산과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하며 이별을 고했지만 아이는 아니었나 보다. 나에게 한 번이면 충분했을 그 경험에 아이는 아직도 목 말라 했다.


12월의 눈 쌓인 한라산은 어른도 오르기 쉽지 않아서 선뜻 오케이 고를 외칠 수 없었다. 어느 부모가 갓 초등학교를 마친 아이를 추운 산으로 몰고 싶겠나. 아기스러웠던 전에는 제 몸의 발걸음만 옮겨도 됐지만, 이젠 산만해진 덩치를 이끌고 올라 가는 것도 버겁거니와 등반 장비까지 갖춰야 하고 네 몫의 간식과 도시락은 네가 지고 가야 한다. 몸집이 거의 어른만해진 13세, 이제는 스스로 책임지고 주도할 것이 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등산에서 하산까지 10시간이 넘게 걸리기에 새벽부터 중무장을 하고 나서야 완등이 가능한데 지금은 겨울이라 해까지 짧다. 무모하게 함부로 도전할만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망설이는 남편과 나를 아이가 내몰고 있었다. 애가 한 번 해 보고 싶다잖아. 그러니 가야 하지 않을까. 근데 겨울 산은 위험하고 힘들텐데 괜찮을까. 그래도 별 수 있어 소원이라는 데 해봐야지. 결국 아이의 손을 들어 주었다.


디데이는 십일 뒤였다. 연휴, 연말이 오기 전에 후딱 해치울 심산이었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더 추워지기 전에, 더 준비가 필요하기 전에 해야 했다. 산행 후기를 볼수록 고개가 저어지는 것이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여보, 한라산은 영하 십이도나 된대. 눈이 쌓여 있어서 아이젠이 필수래. 추우니까 패츠도 있어야겠네. 스틱도 없으면 하산이 힘들. 지난 번에 물 모자라서 힘들었잖아. 생수 넉넉하게 챙겨야 하는데 무거워서 어쩌지. 관음사 코스가 볼 거리는 있지만 더 오래 걸리고 가팔라서 힘이 든다든데, 성판악 코스는 지난 번에 완만했지만 돌이 많고 풍경이 별로라서 더 힘이 들었잖아. 민뽕실이 너 이래도 갈 거야? 괜찮아? 회유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을 해도 결정은 바뀌지 않았고 준비나 잘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학교에 체험 학습 신청서를 냈다. 사유는 한라산 등반. 쓰고 보니 이 얼마나 멋진가. 이렇게 대단한 결심을 한 아이가 내 아들이라니 새삼 감격스럽다. 등반을 반대했던 마음은 어디 가고 '선생님, 저희 아이가요. 한라산 정상에 가겠대요. 체험 학습 내고 한라산 등반한 아이는 전교에서 처음이죠. 이렇게 한 아이가 우리 아이랍니다. ' 구구절절 자랑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너는 제 시간에 나타나 주었다. 휴, 김포공항까지 초치기로 가지 않아도 되겠다. 요 정도는 찾아 오는 걸 보니 바보는 아니었어라는 안도감과 함께 여유있게 9호선에 올랐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 졌고, 우리는 한라산행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1,947.269m 그까짓 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네 마음이면, 한 번 도전해 보겠다는 결심이면 그걸로 되었다. 지금처럼 하고 싶은 거 겁 없이 무대뽀로 덤벼 들면서 살아 가기를, 까짓 거 아님 말고 아니겠니. 춥거나 힘들면 어떻겠니, 한라산 한 번 가 보자. 산이 거기에 있어서 오른다는 영국 산악가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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