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풀지 못한 시간

그때 나는 아직 아이일 뿐이었다

by 유리

어렸을 때 묻어 버린 많은 기억들은

언젠가부터 내 곁에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야.

아직 아이였던 나의 기억들 중 하나는 가장 좋아하는 책인 '어린 왕자'의 결말을 생각하던 때였다.

어렸을 때 어린 왕자의 끝은 조금 모호한 이야기였다. 그렇게나 사랑을 주었던 장미꽃을 두고 간 채 여러 별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던 어린 왕자의 결말이 왜 뱀에 물려 죽는 건지, 왜 비행사에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야만 했던 건지.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조금씩 어른에 가까워져 가면서 난 어린 왕자의 끝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렸을 땐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에 불과했던 책이 지금은 슬픈 이야기로 기억에 남게 되었으니깐.

아이들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면서 많은 현실을 알아가고 있었다. 세상이 장밋빛으로만 반짝이는 게 아니라는 현실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 그 말대로 당시 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거에 서투른 편이었다. 그 때문에선지 나는 내 마음을 얻는 방법도 어색했고, 해결하기 어려운 일은 그냥 덮어 버렸다.

아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나조차 보지 못하게 기억을 까맣게 칠해 버리고 깊게 구덩이를 파 썩어 문드러질 정도가 될 때까지.






내면 깊숙이 쌓인 감정들이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

말하지 못했던 말, 정리되지 못한 감정, 어쩌면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마음들. 그런 시간은 전부 과거 속에 남아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내 곁에 머물러 주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마음이 준비하지 못한 시간이 있었고, 나에게 그런 시간들은 가을과 같은 시간이었다.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오래 가꾸어 둔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고, 노력의 결실인 열매를 맺는 계절인 가을.



어쩌면 우리의 마음도 저마다의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마음의 기억을 낙엽처럼 떼어내는 것일까.



마음이 풀지 못했던 시간은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마음의 형태였다. 어렸을 땐 잘 몰라서 말로 꺼낼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된 감정들은 언제부턴가 내 곁을 지켜 주고 있었다.


가을은 이별의 계절 같지만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열심히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지만 이제는 모두가 쉬어갈 시간.

동물들도 모두 잠에 들고, 나무도 잎을 떨어뜨린 채 다음을 위해 준비하는 기간.

잠시 멈춰 있던 우리의 시간도 준비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그때 우리는 외로웠지만 실은 우리 마음도 나름의 열매를 맺고 떨어지는 잎을 지켜보며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준비하고, 다음을 위해 자라던 중이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고 쉬어가야 했다.

그리고 그 계절을 통과한 나의 겨울은
더 이상 차갑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