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는 영화 '링'의 현실판이다.

영화보다 더 오싹한 육아라는 세계

by 엄마는두번째이름

지금도 기억날 만큼 충격적인 영화가 있다.

내게는 영화 '링'이 그러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라서 다들 보았단 전제하에 결말의 스포일러까지 포함하여 적어볼까 한다.


영화 '링'은 그 유명한,

티비 속에서 나오는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영화.


간단하게 정리하면 정체불명의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사람은 일주일 뒤에 죽는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테이프의 비밀을 깨달은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아들마저 테이프를 보았다는 걸 깨닫고

고민 끝에 아들을 태우고 부모님께 향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아마도 추측컨대, 다음 타깃으로 부모님께 테이프를 보여드리고 자신의 아들을 살리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내게는 아주 오래전 본 이 영화의 줄거리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결말 때문이었다.


아들을 살리려고 낳아주신 부모님을 희생시키는 선택이 어린 나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릴 때일수록 부모님이 세상의 전부인데 그런 나에게 이런 충격적인 결말이라니.


그 잔상은 나를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시간이 점점 흐름에도 역설적으로 영화의 내용은 더욱 생생하게 떠오른다.


특히, 내가 아기 엄마가 되고

돌도 안된 갓난아기를 키우면서부터다.


육아를 하면서 때때로 나는 마치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한때는 육아로 인해 이른 퇴근을 하거나 휴직을 하는 동료들을 부러워했었다.


아기와 오롯이 시간을 보냄으로 인한 힘듦이 불특정 다수에게 받는 직장 스트레스보다 훨씬 나은 일이고 값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엄마가 된 현재의 내가 육아라는 거대한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진리를 깨달아버렸다는 차이가 있다.


'육아란 내가 힘들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그 힘듦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육아라는 거대한 세계 속 비밀을 깨달은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충격에 빠졌었다.


마치 내가 죽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희생해야 하는 비극적인 '링'의 폼을 육아 역시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그 힘듦의 무게가 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내 옆에는 나를 전적으로 필요로 하는,

야생에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생명체가 몹시도 귀여운, 심지어 나와는 꼭 닮은 얼굴을 하고서 하루종일 나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마저도(음식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을 가는 것까지)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이 존재는 나를 하루종일 따라다닌다.

그런 내가 용감하게도

(용감하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육아 해방"을 외치면서 친구들과의

하루동안의 여행을 계획한 적 있다.


돌도 안된 아기를 돌보는 대신 하루쯤의 일탈을 꿈꾼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불과 일 년 전의 나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나에게 있어서는 영화 '링'만큼이나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진.


여행을 결정하고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아기를 맡길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초보 아빠지만 얼마전 병원문을 박차고 나온(?)남편에게 아기를 맡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자유로 인한 설레임이 아닌 돌덩어리를 하나 둔 것 같은 답답함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알았다.

엄마라는 존재는 단 하루 힘들지 않고 자유를 느끼려고 해도 나의 자리는 절대 비어선 안되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누군가는 나의 부모님일 수도,

남편일 수도,

제3자일 수도 있다.


그 한 명이 나 대신 힘들어야만 하며 그 후폭풍은 영화 링에서 부모님께 테이프를 보게 만드는 주인공의 그것만큼이나 강력하고 묵직하다.


엄마와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아기의 귀에 박히는 울음소리

나를 대신하는 누군가의 한숨과 힘듦

그걸 알고 있는 한없이 미안하고 불편한 나의 마음

힘들게 나선 길에서마저도 막상 집 걱정뿐인,

돌아서서마저도 즐기지 못하는 미련한 마음이 그것이다.


같은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즐거울법한 경험을 하더라도 더 이상 예전의 즐거움이 아니다.


그런 경험을 한두 번 하게 되면 더 이상 예전 친구들과의 만남은 즐거움만으로 가득했던 약속이 아니게 된다.


어릴 때부터 알던 친구들과의 만남과 여행에서도 그 각자의 무게는 모두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 모두 예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웃으며 만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즐거움만으로 가득한 홀가분한 상태인 반면 또 다른 이는 나와 같이 뒤에 누군가를 날 대신하게 하고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그 만남은 같지만

전혀 같지 않은 것이리라.

같지만 완전히 다른 무게다.




육아의 비밀과 그로 인한 책임감의 무게까지 모두 알고 있는 지금,


나는 다시 돌아가도 과연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물어본 적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진정한 공포영화가 시작된다.


이 모든 불편함과 그 무게를 알고도 다시 돌아가서 결국 같은 선택을 할 만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생긴 것이다.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생긴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이는 내 삶이 더 이상 로맨스와 연말특집 가족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드라마 미생이 어울릴 만큼, 영화 링이 생각날 만큼 육아는 내게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도 분명 피어나는 사랑이 있다.


영화 속 쫓기는 상황에서도 손을 잡고 뛰는 사랑처럼,

치열한 전투 같은 회사 생활의 드라마 속에서도 신경 쓰이기 시작한 슬며시 피어나는 사랑이 생기듯


이 공포스러운 책임감 속에서 나에게도 딱딱하게 경직된 나를 한없이 무장해제시키는 사랑이 며들고 있다.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사랑의 마법,

내게는 아기의 방긋 웃는 미소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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