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마시다!

by 나봄

아름다운 뷰를 뒤로하고 다시 발길을 돌린다.

십오 분 정도 걸으니 프라하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는 길 내내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아, 정말 유럽에 와 있구나’ 하는 느낌이 새삼 든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벤치에 앉아 커피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자리가 없다.

근위대 교대식까지 약 40분이 남아 있어 프라하성 안의 스타벅스를 찾았다. 이곳도 자리 잡기 경쟁이 치열했지만, 주문 후 대기하던 중 운 좋게 야외 테이블을 확보했다. 걸어오며 보았던 멋진 벤치 감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블로그에서 보던 그림 같은 뷰와도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좋았다. 한국에 있었으면 빨래하다 지친 몸을 달래려고 대충 커피 한 잔 내렸겠지만, 이렇게 맑은 날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어디 흔한가.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여유를 만끽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근위병 교대식까지 5분이 남아, 짧은 다리로 수많은 계단을 바람 가르듯 뛰어올랐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웅장하고 화려한 장면과 달리, 교대식은 생각보다 간단했고 특별할 것도 없어 기다린 40분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시 정오 교대식이 볼만하다"는 말이 떠오르며, 시간이 달라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고궁의 교대식이 훨씬 멋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비투스 성당으로 들어섰다. 한눈에 압도되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웅장한 규모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다만 이곳도 바츨라프 광장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공사 중이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성비투스 성당의 웅장함은 이후 여행에서 본 어떤 성당보다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프라하성을 구석구석 누비며 인증샷을 찍다가, 남편을 찍어주던 중 갑자기 등장한 외국 관광객 덕분에 한바탕 웃음으로 마무리하며 성을 나섰다.

레넌 벽을 지나 카를교로 향했다. 카를교에 들어서서도 여기 맞는지, 어느 방향인지 두리번거리는 우리 셋은 그야말로 덤 앤 더머 같았다. 카를교 위에서 프라하성과 페트린타워를 바라보는데, "저기서 여기까지 우리가 걸어왔다고?" 싶을 정도로 멀어 보였다. 우린 서로 마주 보며 큰 일이나 한 것 마냥 “정말 대단하다”며 격려했다.

그렇게 오래 걸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몸이 내 몸이 아닌 듯한 느낌.

그래도 카를교의 야경은 꼭 보고 싶었다.

첫날 시계탑에서 멀리 바라봤던 프라하성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셋이 합의해 숙소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오늘은 24시간 교통권도 있으니까!


휴식 후, 오늘의 저녁 식사 장소인 “코젤로브나”로 향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맥주다.

혹여나, 우리 가족이 전부 술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남편은 술을 매우 즐긴다. 하지만, 나와 딸은 거의 못 마신다. 난 인생 최고 주량이 맥주 1000cc다. 그것도 20대일 때다. 딸은 더하다. 술의 취기가 올라오는 느낌이 싫어 마시지 않는다. 어쩌다 마시는 게 맥주 마실 때 한 모금씩 시음하는 정도이다.

이런 내가 유럽 여행 와서 매일 맥주를 마시고 다니는 게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취하지도 않는다. 그냥 즐기며 기분 좋게 마신다. 이런 게 여행의 힘인가?

운이 좋은 건지, 대기가 길다는 코젤로브나에 어렵지 않게 입성했다.
다크와 라이트로 맥주를 주문하고 스코프비치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옆 좌석에 앉은 한국인 모녀의 대화가 들려온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의 우리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모녀도 1인 1 메뉴가 모자랄까 봐 더 주문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듯했다. 그래도 이곳은 음식 양이 적당해 그나마 다행인 거다.

기다리던 맥주가 나왔다. 번갈아 한 모금씩 마셔보는데, 역시 말이 필요 없다. 특히, 흑맥주는 입에도 잘 안 대던 내가 여기서는 흑맥주도 잘 마신다. 희한하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다 마셔버렸다. 아.. 진짜..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나서 다시 맥주를 추가한다.


맥주도 맛있지만, 이 공간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다.
모르는 음악에 흥얼거려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들끼리 잔을 부딪치며 웃고, 모르는 사람에게 건배를 해도 기꺼이 받아주는 분위기.

흐르는 음악에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을 타는 나를 보면서, 나 자신이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음을,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느꼈다.


“아, 내가 진짜 탈출했구나.”

“명절 탈출이 아니라, 내 안의 나를 탈출시킨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즐기고, 카를교로 이동한다.

낮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조명이 비추는 성상들 사이로 울려 퍼지는 아코디언 연주가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블타바강을 지나는 화려한 빛의 유람선, 강 위로 번지는 조명빛 뒤로는 프라하성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페트린타워가 은은하게 하늘을 밝히고 있다.


특히, 프라하성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프라하성의 야경을 담으려 계속 핸드폰 셔터를 누르지만, 제아무리 값비싼 렌즈도 지금 이 모습을 담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내 눈에만 담아야 함이 아쉬울 정도다.
지금 이 순간의 감동을 절대 잊지 않고자 두 눈과 내 오감으로 만끽해 본다.

다리 위를 걷다 보니, 낮에 지쳐 있던 몸도 어느새 가벼워졌다.

맥주 때문일까? 아니면 이 도시가 가진 자유로움 때문일까?

오늘 하루의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흘러가며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이 순간만큼은 진짜 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