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키크룸로프

by 나봄

프라하에서 맞는 3일 차.
아직 한국도 프라하도 아닌 애매한 시차에 시달리며 겨우 두 시간밖에 못 잤다.

새벽 여섯 시, 체스키크룸로프로 가는 플릭스버스를 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프라하의 신호등은 몇 초가 남았는지 표시도 없고 깜빡임도 없다.
파란불이라 건넜는데, 반도 못 가 빨간불로 바뀌어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히 관광객에게 흔한 풍경인지 차들은 멈춰 있었고, 놀란 토끼눈으로 후다닥 건넜다.


요즘 인생 처음이 많다. 플릭스버스도 그렇다.
지나가는 차를 보면 한국 고속버스보다 시설이 허술해 보이는데, 마냥 설레기만 하다.

드디어 기다렸던 버스가 도착했다. 그런데 줄이고 뭐고 소용이 없다.
버스기사 옆에 먼저 붙어 바코드를 보여주는 사람이 승자다.
승차권과 좌석의 표기가 달라 찾는 법을 모르겠다. 다른 관광객들도 마찬가지다.
기사님은 빈자리 아무 데나 앉으라고 하지만, 승객들은 혼돈 그 자체다.
기사님은 체코어, 사람들은 영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자리나 앉는다.

황당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난다.
한국이었다면 짜증부터 났을 텐데, 여기선 그냥 또 하나의 추억이 된다.

체스키크룸로프에 도착했다.
맞게 가는 건가 싶을 정도로 터미널 근처는 한적했다. 하지만, 망토다리에 도착하자 한국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가 뒤섞여 들려온다.

우리처럼 사람들이 몰리기 전, 이른 시간에 도착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배가 고픈 우린 식당을 먼저 찾았다.

구글 맵을 돌려가며 찾아간 직화구이 유명한 동굴식당은 오후 세 시까지 만석이라 한다.

예약할 걸… 맥주에 정신이 팔려 미리 챙기지 못했다.


결국 차선으로 트래블러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돌린다.
인종차별 논란이 있다는 블로그 글이 떠올라 살짝 긴장했지만, 직원은 친절했다.
자리 선택권까지 주며 안내해 준다.
안쪽 자리에 앉자, 딸이 “동굴식당은 못 갔지만 여기도 동굴 분위기네. 됐네 됐어.”라며 웃는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목살 스테이크, 메쉬포테이토, 직원 추천 돼지 앞다리살 요리, 오리다리 구이에 레드캐비지, 그리고 에겐 베르그 맥주까지 주문했다.

근데, 진짜 미쳤나 보다. 쌉싸름한 흑맥주도 꿀물 마시듯 부드럽게 넘어간다. 술꾼이 되어가는 과정인가?
이미 스트라호프 수도원 맥주를 맛본 터라 ‘와!’ 할 정도의 감동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음식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메쉬포테이토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생각날 만큼 맛있었고, 오리다리는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새콤한 레드캐비지와도 찰떡궁합이다.
블로그 추천 메뉴는 역시 실패가 없다.

식사 전후, 화장실은 필수다.
유럽 공공화장실은 대부분 유료라, 무료일 때 몇 번씩 들르게 된다.
돈을 내고 가야 하는 화장실이라니… 이건 좀 치사빤스다 싶다.


성비투스 성당으로 가는 길, 어린 학생들이 가방을 아무 데나 던져두고 깔깔대며 논다.
초등생 시절, 친구들과 노느라 책가방을 잃어버리고 집에 온 아들 생각이 나 웃음이 터졌다.
편과 딸이 이곳저곳 둘러보는 동안 성당 예배석에 앉아본다.
오후의 피로와 점심에 먹은 맥주의 취기가 몰려왔다.
“이러다 나라 망신 시키겠다.” 싶어 꼿꼿이 앉아 눈꺼풀에 힘을 실어본다.
누가 봐도 난 기도 중이라 생각할 것이다.

세미나르니 정원에서는 일본인 관광객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딸아이가 찍어준 사진은 빨간 양말 때문에 하의 컷 당하고… 이런저런 추억을 만들며 돌아다녔다.
체스키크룸로프 성과 자메츠카 정원 등 볼 수 있는 곳은 다 둘러봤다. 내가 언제 또 오겠는가.

프라하로 돌아가기 위해 망토다리를 다시 지나간다.
이른 아침과 달리, 각국 중년 여성들의 ‘런웨이’가 펼쳐진 듯 정신없다.
알록달록한 옷차림과 완벽한 포즈, 모델이 따로 없다. 대부분 내 또래쯤 되어 보였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떠올랐다.


십여 년 전부터 우리는 해외여행 가자며 회비를 모았었다.
하지만 아이들 입시와 집안일로 번번이 미뤄졌다. 그나마 국내여행이라도 다니는 게 감사할 뿐이었다.
3년 전부터 다시 해외여행 이야기가 나왔지만, 늦게 결혼한 친구의 아이 입시 시즌과 맞물렸다.
그렇게 기다린 친구들과의 해외여행이 내년 겨울, 드디어 가능할 것 같다.

그때는 꼭 갈 수 있겠지?
우리도 저 중년 여성들처럼 깔깔대며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겠지?
상상회로를 돌리다 보니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해진다.

이깟 여행이 뭐라고…
시댁 챙기랴, 아이 챙기랴, 친정 챙기랴.
늘 다른 사람만 챙기느라 내 삶을 살지 못했던 우리 ‘낀 세대’…
하지만 내년부터는 자유다. 나도, 친구들도.

프라하행 버스에 올라타자, 피곤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지금 아니면 기회는 없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오늘을 기록하기 위해 글을 써 내려간다.
그런데, 쓰면 쓸수록 눈꺼풀도 점점 내려온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니, 프라하다.
기적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