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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일기 36 – 2025. 1. XX

‘모든 것이 풍경이다’

by 청효당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전시는 작년의 합스부르크 전시에 이어 국립박물관이 터뜨린 ‘대박전시회’로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작품을 볼 수 있어서일 것이다. 국립박물관의 소개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1900년대의 진부하고 보수적이던 도시의 문화를 예술로 타파하고자 한 예술가들, ‘황금의 화가’로 알려진 구스타프 클림트 그리고 에곤 실레를 비롯한 빈분리파의 중추 예술가 6명의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빈 분리파의 ‘분리’란 ‘고리타분한 전통 미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빈 분리파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이 클림트이고 ‘그가 당긴 혁신의 불씨를 에곤 실레 등이 이어받아 표현주의를 꽃피웠다’는 설명이다.


며칠 전에 많은 눈이 왔고 또 대단히 추운 날씨임에도 전시장은 관람객들로 붐빈다. 하루 관람객 수를 적정 인원으로 조정하는 등 박물관 측이 노력하고 있지만 특히 휴일에는 넘치는 관람객들로 온전한 관람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벽에 전시된 그림들을 따라 줄지어 이동하면서 그림 옆에 부착된 설명을 읽거나 대여받은 오디오로 들으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미안한 마음에 그림 앞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서둘러 이동하게 되고 줄에서 나와 사람들 뒤의 틈새로 ’대충 보고' 넘어가기도 한다. 관람객의 관심을 끄는 그림은 아무래도 5부의 에곤 실레의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드로잉을 비롯하여 자화상과 풍경화 등 에곤 실레의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 역시 인기인 것 같다. 이 작품이 에곤 실레 작품의 특징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크지 않은 그림인데 내게는 민음사 판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인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표지화로서 익숙하다. <어머니와 아이>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특별히 나는 그의 풍경화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골고다 언덕>, <언덕 위의 집과 풍경>, <블타바강 가의 크루마우>, <작은 마을 III> 등 에곤 실레의 풍경화는 단순히 경치를 그린 것이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나무(겨울나무))> 같은 그림은 오히려 추상화에 가깝다. 그의 풍경화는 ’풍경이나 자연 속에 자기 자신만의 감정을 담아서 표현한 것‘이다. 그의 풍경화는 도시의 풍경을 검은 색조로 그린 것들이 많다. 해설에 따르면 에곤 실레의 외로움이나 고독감을 보여주는 그림들이라고 한다.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누드 드로잉의 비교, 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구스타프 클림트의 자리가 비어 있는) 영상을 마지막으로 전시는 마무리된다. 멀리 오스트리아까지 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귀중한 그림들이라 이 소중한 기회에 대한 기억과 감동은 오래 남을 것 같다.

<골고다 언덕> <언덕 위의 집과 풍경>

내가 특별히 에곤 실레의 풍경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즈음 ’풍경‘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다. 막연하기만 하던 풍경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해준 계기는 허만하 시인의 글에서였다. 오래전에 읽었지만 글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던 시인의 아름다운 산문집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를 다시 읽었는데, 특히 풍경에 대한 몇 편의 글(산문집 1부의 제목이 '풍경'이다)이 새롭게 와닿았다. 시인처럼 섬세한 표현은 할 수 없었지만 그동안 어렴풋이 느껴왔던 풍경에 대한 생각(허만하 시인의 표현으로 하면 ’풍경의 필연성‘)에 큰 공감을 느꼈다고 할까. 그동안 나는 시인이 말하는 ’풍경은 단순한 경치가 아니다. 풍경이란 순간적인 것이다.‘라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해왔던 것 같다.

풍경과 관련된 시인의 글을 몇 대목 옮겨 보자.

“풍경이란 누구에게나 어느 한순간 하나의 필연처럼 우리의 머리에 박힌다. 그것은 큐피드의 화살과 같은 것이다. 풀냄새가 자욱한 들길을 걷다가 문득 되돌아보았을 때 왈칵 달려들던 이름 없는 풍경. 저 혼자만의 그런 풍경을 주문처럼 지니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수없는 풍경에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그 무한한 풍경 가운데의 어느 한순간의 풍경이 느닷없이 어느 순간의 나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비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이름 없는 한 풍경을 만나게 되는 것은, 내가 풍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어느 순간의 나를 주박하고 마는 것이다.”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그림이나 세잔느의 <산트 빅투아르산> 같은 그림이 바로 시인이 말하는 그런 풍경을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게 그런 의미로서의 풍경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경험과 생각이 빈곤한 탓인지 떠오른 것이 많지는 않은데 굳이 들자면 두 가지를 꼽을 것 같다. 대학 2학년 여름 방학 때 친구들과의 소백산 여행에서의 기억이다. 연화봉 언저리에서 비를 맞았는데 비가 개인 후의 장면이다. 우리 일행은 자욱한 안갯속의 산길을 일렬종대로 걷고 있었는데 한 치 앞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는 짙었다. 앞서가는 친구가 언뜻 보였다가 이내 거짓말처럼 안갯속으로 사라져 가는(빨려 들어가는) 장면의 연속이 마치 다른 세상의 풍경 같아서 ’감동‘적이었던 기억이다. 다른 하나는 중학생 땐가 여름 방학을 보내던 시골 고향의 큰집에서였다. 늦은 밤이었다. 전기가 없던 시절로 대청마루 기둥에는 희미한 남포불(램프)이 걸려 있었다. 사방은 시간이 멈춘 듯 적막한데 이름 모를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리던 그 괴괴하고 적적한 밤. 아마 소변을 보러 뜰로 나왔다가 보았을 그 풍경이 지금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써 놓고 보니 과연 이런 장면이 시인이 말한 그런 풍경에 해당하는지 겸연쩍기는 하다. 그런데 풍경이라는 단어에는 왜 바람 풍風자가 들어가는 것일까? 풍경 뿐만 아니라 풍미, 풍속에도 풍 자가 들어가는데 자연의 의미가 포함되는 것일까? 아둔한 머리로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작은 제목으로 적은 ’모든 것이 풍경이다‘라는 문장은 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말이다. 최근에 그의 일기와 그림을 묶은 에세이집 『먼 산의 기억』의 번역 출간에 맞춰서 그가 국내 언론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한 말이 기억나서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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