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딸 내외는 쌍둥이 딸 이름을 짓느라 적잖이 고심한 듯하다. 출생 후 한 달 이내에 출생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과일 이름을 약간 변용하여 임시 이름을 지어 부르기는 했는데 그걸 정식 이름으로 정할 수는 없었다. 딸 내외 스스로가 순 한글 이름을 포함하여 몇 개를 생각해 내기도 했지만 어떤 이름은 너무 흔한 이름이고, 또 어떤 것은 서양 이름 같고, 또 다른 것은 남자 이름 같거나 우스꽝스러워 남들의 놀림감이 될 것 같다는 이유로 선뜻 정하지를 못했다. 쌍둥이라서 두 이름의 조화까지 염두에 두려다 보니 적당한 이름을 찾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결국 연고가 있는 작명가를 찾아가 후보 이름을 몇 개 받아 와서 여러 차례 ‘수정 보완’ 끝에 겨우 ‘최종 결정’을 내린 듯하다. 각각의 이름 끝 자를 공통으로 한 것인데 들어 보니 이름이 가진 뜻도 좋고, 발음하기도 편한 데다 그렇다고 흔한 이름도 아니어서 잘 지어진 것 같았다. 단지 둘 다 이름을 구성하는 글자 하나의 한자가 흔한 자가 아니었다. ‘인명용’으로만 쓰이는 한자라고 했다. 아이들의 이름이 정해졌으니 이제 비로소 존재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고 해야 할까?
우리 아이들의 이름은 내 어머니가 지어 오셨다. 어머니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 작명가가 지어준 것이다. 위로 딸 둘의 이름은 우리나라 여자 이름으로는 비교적 흔한 이름이었고 막내인 아들의 이름이 다소 특이했다. 특이했다기보다 발음하기가 쉽지 않았다. 센 발음이 나는 이름이었다.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손자의 ‘사주팔자를 고려’하여 지어 온 이름이라 ‘이의 제기’하지 않고 그냥 정했다. 내 이름은 집안의 항렬에 따른 돌림자가 들어간 이름이었는데 한학이 깊은 집안 어른이 지어주었다. 아마 그 당시 대부분의 집안(특히 농촌 향반鄕班사회)이 그랬을 것이다. 정년퇴직 후 한동안 재미 삼아 공부한 사주명리학 책을 보고 그분들의 작명 원리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오행의 상생 원리에 따른 것인 듯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흙 토 변이 들어간 이름이라면 토생금土生金의 원리에 따라 그다음 대는 쇠 금 변이 들어간 이름으로 짓고, 또 그 아랫대는 금생수金生水의 원리에 따라 물 수 변의 글자가 들어가는 이름으로 정하는 식이다. 그래서 돌림자만 보고도 서로 간의 항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런 작명 방식을 고수하는 집안은 없는 것 같다. 내 사촌들을 비롯한 우리 세대만 해도 자녀들은 항렬이나 돌림자를 고려해서 이름을 짓지 않은 지가 오래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원칙’ 없이 그냥 편한 대로 지은 집도 많았다. 이제는 그런 식의 작명은 사라졌지만, 딸만 계속 낳아서 다음 아이는 아들이기를 바라며 ‘마지막 딸’이라는 의미로, 길 가다가 낳았다고, 부엌에서 해산했다고, 몸에 점이 있다고, 바위처럼 듬직하라고··· 등등이다. 그런 이름에 오히려 복이 든다며 일부러 그렇게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자 이름이면 男이나 雄 같은 글자를 선호하고, 여자 이름에는 子나 女나 順과 같은 글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시대의 거울이라는 소설 속 인물의 이름만 봐도 그렇다. 점순이(김유정의 「봄봄」, 「동백꽃」), 이뿐이(김유정의 「산골」), 막동이(황순원의 「집」), 억쇠, 득보(김동리의 「황토기」), 바우, 귀동(황순원의 「황소들」), 심지어는 똥례(방영웅의 『糞禮記』)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이렇게 ‘대충’ 지어준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철들어 개명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름을 대충 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름을 ‘운명’과 연결해서 집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지 않아 반성을 하기도 한다.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 이름을 딴다거나 아름다운 우리말을 활용해서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들이 때로 존경스럽기도 하다.
이름 짓는 일을 생각할 때마다 기억나는 것이 있다.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 선생이 자녀들의 작명에 대한 에피소드를 적은 글이다. 그분은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월간지 『샘터』에 오랫동안 연재를 하고 또 여러 권의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 『가족』 첫 권(1984년 발간)에 그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첫째인 따님의 이름은 소설가 황순원 선생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황순원 선생의 장편소설 『일월』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아들의 이름은 도단인데 그렇게 작명한 과정이 엉뚱하고 재미있다. 아들을 낳을 즈음 작가는 세계일주 여행 중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출산 소식을 들은 작가는 아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최파리’라고 지어 보냈다. 지각 출생신고를 하기 전까지 이 이름으로 부르다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바꾼 이름이 ‘도단’이었다. ‘최인호 씨의 장남 최도단 군 경성제대 수석 합격’이라는 신문 기사가 실린 꿈을 꾸어서였다고 한다. 도단은 ‘막다른 골목’이라는 뜻이라 작가의 아내가 어처구니없어하며 화를 냈지만 어느새 아들의 이름은 최도단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글에서는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없어 지금은 아드님의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巴里와 도단>이라는 그 글에 작명소에서 이름 짓는 것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나와 있는데 ‘뜨끔한’ 마음으로 옮겨 본다.
‘물론 손쉬운 방법으로 돈 5백 원 들고 작명소에 가서 이름을 지어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방법은 자기가 지어준 이름으로 자식녀석이 평생 불리워야 하며 그 이름 때문에 행 · 불행이 좌우될지도 모른다는 미신적 생각 때문에 작명의 의무를 포기하고 타인에게 의뢰해 보려는 심보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일견 작가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작명 의뢰'가 '이 험난한 세상’에 탈 없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발로일 테니 그걸 어떻게 나무랄 수 있겠는가.
이제 이쁜 우리 외손녀들의 이름이 지어졌으니 그저 건강하고, 씩씩하고, 밝고, 총명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마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