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단상 21
요즘 우리 부부의 하루는 눈뜨자마자 손녀들 영상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제 태어난 지 열흘이 지난 쌍둥이 외손녀다. 큰딸과 사위가 가족 카톡방에 올리는 손녀들 영상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영상을 보내주지 않을 때라도 산후조리원의 CCTV를 연결해서 언제든지 손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쌍둥이라 ‘명찰’(아직 이름을 짓기 전이어서 별명)을 확인해야만 구별이 가능하다. 아기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영상을 보고 있으면 세상 모든 근심이 없어지는 듯하다. 신생아라 대부분 평온하게 자는 모습이지만 때로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는 모습에는 온 가족이 환호를 하고 찡그리거나 울 때면 불안해한다. 큰딸이 결혼한 지 5년이 되도록 아기가 없어 우리 내외는 걱정이 많았다. 요즘은 여러 사정으로 일부러 아기를 갖지 않는 커플들도 많은데 큰딸 내외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딸의 나이가 삼십 대 후반이라 우리 부부는 초조했지만 딸 앞에서는 그런 표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내 생일을 축하하는 가족 식사 자리에서 딸이 임신 소식을 ‘깜짝 발표’했을 때 아내와 나는 눈물을 보일 정도로 기뻤다. 그리고 딸에게 고마웠다. 딸은 뱃속에 든 태아의 초음파 사진과 함께 짧은 문장을 적은 축하 카드를 나와 아내에게 주었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된 것을 축하해! 아빠가 매번 절에 가서 기도해 준 게 이제 결실을 맺네. 이 소식이 아빠한테 좋은 생신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어. 얼른 기운 차리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손주들 보자. 사랑해. ㅇㅇ올림>. 내게 준 딸의 글이다. (그 무렵 나는 이석증으로 한 달 가까이 건강이 좋지 않았다). 작년 가을에 돌아가신 어머니도 한 해 두 해 시간이 가자 이제나저제나 하며 손녀의 임신 소식을 기다렸다. 큰딸이 집에 올 때마다 어머니는 주저주저하면서도 소식을 묻곤 했다. 물론 딸아이에게는 그게 큰 스트레스였기에 친정에 오기를 꺼질 정도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꺼내면 집안 공기가 ‘냉랭해지기도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손녀의 임신 소식을 알았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이다. 건강이 많이 나빠졌을 무렵이다. 어머니를 부축해 일어나 앉게 하고 내가 딸의 임신 소식을 알렸다. 어머니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어머니는 반가워하시며 딸아이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셨다. 딸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 후에도 두 번인가 어머니는 내게 ‘ㅇㅇ이 애기 있다 그랬지?’하며 확인하셨다. 어머니가 증손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딸의 임신 사실을 알고 가신 게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임신을 확인한 후 딸은 몇 군데 대형 병원을 정해 놓고 번갈아 가며 자주 경과를 확인하러 다녔다. 지방에 사는 딸이라 뱃속의 아이가 커갈수록 서울에 오가는 일이 수월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한두 군데 정해 놓고 정기적으로 검진받으면 되지 뭐 그렇게 힘들게 오르내리며 여러 곳을 찾아다니는 건지, 지나친 관심이 아니냐며 제 엄마는 때로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지만 딸의 논리를 이기지는 못했다. 출산일이 다가오면서 딸은 자연분만과 수술분만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자연분만을 권유하는 의사도 있었지만 대체로 나이를 고려하고 쌍둥이임을 감안해서 수술분만을 권유했다. 입원 사흘 전 딸은 자연분만을 결정했다. 아내와 나는 그 결정이 불안했지만 딸의 의사를 존중했다. 딸은 입원한 지 이틀 동안의 자연분만 시도 끝에 결국 수술분만을 했다. 그사이 딸이 겪은 고통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가족이 집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시간 또한 말 그대로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수술실로 이동했다는 사위의 문자 이후 후속 소식이 없어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화기를 옆에 놓고 애를 태우며 거실을 서성대다가 연락 없는 사위를 원망하기도 하며 온갖 불안한 생각에 진땀이 날 정도였다.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사위의 연락이 있었다. 산모도 아이들도 다 건강하다고 했다. 뒤이어 수술실을 나오는 손녀들의 영상을 보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문득 큰딸이 태어날 때가 생각났다. 아내도 큰딸을 낳을 때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예정일이 지나도록 진통이 없어 입원 후 유도분만을 시도하다가 결국 수술로 출산을 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일까 그때 일이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도 저런 고통을 겪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나 자신의 무심함이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딸은 출산을 하고····. 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또 한 생명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 자연의 법칙. 작년과 올해, 불과 반년 사이에 겪는 이 순환의 현상에 많은 것을 느끼는 요즈음이다. 영원히 살 것 같던 삶도 결국은 끝이 있게 마련이고, 언제 올지 갈망하며 기다리던 새 생명도 때가 되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 인생의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을 왜 그리 탄식하고 조바심 내고 애를 태웠는지······. 살아온 매 순간이 고비 아닌 적이 없었지만 지나고 나니 그저 한 조각 아스라한 추억으로만 남는 것 같다. 영원히 계속되는 겨울도 없거니와, 화창한 봄날 또한 때가 되면 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 삶이 꽃길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가시밭길만도 아닌 것이라는, 별것도 아닌 깨우침에 새삼 감탄하는 노년이다.
「인사추홍래유신人似秋鴻來有信 사여춘몽료무흔事如春夢了無痕
사람은 기러기 같이 신의 있게 오지만, 일이란 봄날 꿈처럼 아무 흔적이 없다」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이 있네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이하 생략)
위의 시는 송나라 시인 소동파蘇東坡 시의 한 구절이고, 아래 시는 나희덕의 시 <뜨거운 돌>의 한 구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