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한바탕 봄날의 꿈이었을까?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졌던 한 대학 후배와 긴 통화를 했다. 얼굴을 본 지는 30년쯤 된 것 같고, (전화로) 목소리를 들은 지도 20년은 넘은 것 같다. 처음 만난 건 그가 갓 스물의 대학 신입생이었고, 나는 3학년(2학년 때 복학) 때였으니 거의 50년 전의 일이다. 새삼 긴 세월이 지났음을 실감한다. 언론인인 그에게 무언가를 알아보려고 문자를 보냈더니 뜻밖에 전화를 걸어왔다. 퇴직한 지 6, 7년이 지난 것을 이번에 알았다. 그도 이미 60대 중반을 넘어섰을 나이일 텐데 내게 떠오르는 모습은 20대 초반의 그 풋풋하고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목소리도 익숙했던 그때 그대로였다. 필요한 용건이 끝나고 서로 간의 근황을 확인한 뒤, 후배는 내게 당시 같은 동아리에 속했던 선후배들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몇몇 선후배와 간헐적으로 교류를 이어왔지만 그 후배는 졸업한 후로 동아리 친구들과는 거의 소통이 없었던 듯했다. 이미 내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옛 친구들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줄줄이 등장했다. 사학과의 김 아무개, 음대생이었던 누구누구, 치과대의 이 아무개, 술만 마시면 아무나 붙들고 울던 누구, 공연 연습한다고 수업을 너무 빼먹어 유급이 된 여학생 등, 후배는 용케도 그 이름들을 또렷이 기억해 냈다. 사업에 성공하여 부자가 된 친구, 문인이나 기자가 된 후배, 병원을 운영하는 선배, 아직도 연극계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후배 등 지금도 교류가 있거나 소식 정도는 알고 있는 몇 사람의 안부는 전해줄 수 있었지만, 그가 열거한 대다수 친구들의 소식은 나 역시 깜깜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개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도 서넛이나 되었고 해외로 이민 간 친구도 있었다.
여러 사람의 안부를 묻고 각자와 관련된 당시의 기억을 불러내던 후배가 불쑥 “ㅇㅇ누나는요? 형이 짝사랑하던” 하며 불쑥 나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끄집어냈다. 뜻밖의 질문에 갑자기 허를 찔린 나는 당황했다. 아니, 이 친구가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그런 소문이 동아리 회원들 사이에서 다 알려진 것이었단 말인가? ㅇㅇ는 3년 후배였다.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건 같은 2학년이었지만 나는 복학생이었다. 한참 뒤에 알았는데 아버지가 병원 원장이었다. 언젠가 쓴 적이 있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와서 처음 본 여학생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은 이후, 나는 이런 유형의 여자를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용모가 '부티 나고’(그렇다고 옷차림이 고급스럽지는 않았다) 지적이고 한편으론 ‘도도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동아리에 들어온 후 나는 첫눈에 이 후배에게 ‘특별한 호감’을 가졌다. 한동안 열병 같은 느낌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배가 내가 ‘넘볼’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막연한 직감 같은 것이었다. 그해 여름 방학이 시작하기 전 동아리 회식이 있었다. 자주 가던 막걸리집에서였다. 저녁 무렵에 시작한 술자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시간이 가면서 술에 취한 학생들이 늘어났고 파장 분위기가 되었다. 인사불성이 되어 탁자 위에 얼굴을 파묻은 사람, 불만에 가득 찬 소리를 내지르며 상대방과 다투는 사람, 어떤 정치적 사안을 두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친구 등.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집이 먼 사람들 몇은 자리를 떠서 썰렁하기까지 했다. 병원 집 후배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맞은편 벽 쪽 탁자에 혼자 있었는데 술은 거의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나중에 알았지만 본래 그 후배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나는 그 탁자로 갔다. 그리고 내 딴에는 사랑 고백이라는 걸 한 것 같은데 무슨 말로 시작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다만 그 와중에도 스스로 방어벽을 치는 말로 마무리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네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냥 내 마음을 표시한 것일 뿐이니 부담 갖지는 마라’. 대강 이런 한심한 고백이었던 것 같다. 후배는 내 말에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고 반응도 없었다. 그냥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술집을 나왔던 것 같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졸업 때까지 3년 동안을 여느 선후배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그녀를 대했고, 그녀 또한 자연스럽게 나를 대했다. 물론 내 마음속에서는 후배를 향한 마음이 온전했을 리는 없다. 적어도 같은 시기를 함께 보낸 동아리 친구들 중에 그런 ‘해프닝’을 눈치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 후배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 더욱이 그 해프닝이 벌어진 것은 이 후배가 입학도 하기 전의 일이었는데. 그렇다면 동아리 선후배들 모두가 다 눈치채고 있었던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어쩌면 이 후배에게 그런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던지도 모른다. ‘자네는 별 걸 다 기억하고 있구먼’ 하며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어떤 그리움 같은 것도 생겨 가슴이 뭉클해졌다. 졸업한 후 나는 그 여자 후배를 본 적이 없다. 오래전 들은 소식으로는 외교관과 결혼해서 해외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후배는 “형, 그 좋은 사람을 끝까지 따라가 붙잡았어야지요” 하길래 나는 “아니야, 나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지“ 하며 서둘러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냥 ‘조금 특별한 추억’의 하나일 뿐이다. 젊은 날의 객기 같은.
후배는 이것 말고도 두 가지를 나에 대한 기억으로 꼽았다. 그중 하나가 송창식의 노래 <새는>이었다. 내가 그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했다. ”형이 그 노래는 정말 잘 불렀지요“. ”그래? 내가 그 노래는 좋아하기는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부른 기억은 없는데. 나는 기억 못 하는 것을 자네는 잘도 기억하는구먼 “ 그러자 후배는 자주 드나들었던 학교 앞 주점 이름을 대며 거기서 많이 불렀다며 일깨워주었다. 다른 하나는 담배 이야기였다. 요즘도 담배를 피우냐기에 끊은 지 30년이 넘는다고 했더니 ”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담배예요“ 하며 내가 담배를 참 ‘맛나게 피웠다’는 말을 했다. 사실 그 무렵 나는 골초였다. 주머니 사정이 빈약했던 내게 '간간이 담배 제공’을 해준 건 여학생 후배들이었다. 참 염치없는 짓이었다. 능력이 안 되면 담배를 끊었어야지. 이런저런 추억들을 한 시간 가까이 주고받았다. 새삼 아픈 곳을 상기시키는 에피소드도 있었고 애틋하고 그리운 추억도 있었다. 후배와의 통화를 끝내고 한동안 나는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반세기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마치 한 편의 연극 같기도 했고 꿈속의 일인 듯도 했다. 그럴까? 그건 그저 한바탕 봄날의 꿈이었을까?
(밤에 오랜만에 <새는>을 들으며 '소름이 돋도록' 놀랐다. 노랫말이 당시의 내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