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개인전을 보러 인사동에 갔다. 인사동에 갈 때마다 옛날 일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 있다. 탈방이다. 1986년이던가 7년이던가 인사동 탈방에서 하회탈 2점을 산 적이 있다. 가까이 지내던 회사 선배 한 분과 함께였다. 양반탈과 부네탈 한 점씩을 샀다. 퇴직 후에도 두어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이 선배와 아주 가끔 그때 탈 산 추억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 탈들은 지금도 책장 한 곳에 잘 보관되어 있다. 탈방을 지날 때마다 ‘수십 년 전 탈을 산 곳이 바로 이 가게였지’ 하고 짐작하면서 지나치거나, 몇 번인가는 유리창 너머로 가게 안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마음에서인지 예전에 탈을 샀던 그 가게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몇 걸음 지나친 발걸음을 되돌렸다. 손님은 없고 주인인 듯 보이는 분이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탈을 샀던 그 당시의 주인을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른 분 같았다.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면 더 연배가 지긋한 분이라야 맞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마 대를 이어 공방을 이어가고 있는 분일 것이다. 나는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1986년인가 7년에 인사동 탈방에서 탈을 산 적이 있는데 혹시 이 가게가 맞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가게를 개업한 게 언제인지 물었다. 사장님은 1984년이라고 했다. 그렇구나. 개업을 1984년에 했다면 (지금 인사동에 다른 탈방이 없다면) 이 가게에서 하회탈을 산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까닭 모르게 ‘안도’랄까 ‘반가움’ 같은 기분에 ‘예전에 이곳에서 양반탈과 부네탈 한 점씩을 샀다’는 말을 반복한 뒤 서둘러 가게를 나왔다. 탈방을 나와 전철역으로 가면서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 그때 계시던 사장님이 맞는지, 왜 하회탈만 만들어 파는지’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리 서둘러 나왔는지 아쉬움을 느꼈다. ‘다음에 다시 인사동에 오면 더 자세한 걸 물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대학교 2학년 봄에 탈춤 공연을 한 적이 있다. 탈춤 동아리에서였다. 송파산대놀이였다. 수업 끝나고 모여서 밤 늦도록 연습한 기간이 한 달은 넘는 것 같다. 1970년대 중반의 엄혹한 정치의 계절이었다. 당시 민중운동 같은 게 활발하던 시절이고 탈춤도 그런 운동 중 하나였다. 대학마다 탈춤 동아리가 있었고 공연도 많았다. 인사동 탈방을 보고 온 탓일까, 서랍 속에 지금도 보관 중인 예전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당시 공연 때 만든 팸플릿과 대본이 있었고, 탈춤의 역사와 이론들을 적어 놓은 색 바랜 노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민중의 연극인 탈춤은 마을굿에서 유래한 것으로(풍어와 풍농을 기원하는 굿의 흔적) 민중 생활의 변화와 민중 의식의 성장과 함께 극으로 발전했다’
‘신을 나타내던 가면이 차츰 인간을 나타내는 가면으로 바뀌면서 굿에서 극으로의 전환을 통해서 탈춤이 성립했다’(하회별신굿이라는 명칭에서도 그와 같은 성격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18세기) 농촌에서 농민이 공연하던 <농촌 탈춤>을 기초로, 도시 성격의 마을에서 상인이나 이속이 주동이 되어 공연하는 <도시 탈춤>으로 발전했다’. <도시 탈춤>에는 야유(동래와 수영), 오광대(통영 · 고성 등), 산대놀이(서울 근교의 가면극을 일컫는 것으로 송파 · 양주 등에서 활발했다), 그리고 황해도 봉산 · 강령 등의 탈춤으로 분포된다‘. ’(예전에는 서울 근교였던) 녹번, 애오개, 사직골 등지에서 시작한 산대놀이를 본산대놀이라고 하고, 양주 · 송파의 것은 본산대놀이에서 파생된 별산대놀이라고 한다‘. 등등의 내용에 밑줄이 쳐져 있다. 꽤 열정을 가지고 공부했구나 하는 감회가 일면서 잠시 옛날 생각에 젖었다.
송파산대놀이는 모두 8 과정科程으로 구성된다. 내가 맡은 배역은 6 과정에 나오는 ’신장수‘였다. 송파산대놀이에서 비중이 큰 배역이라면 취발이와 노장을 들 수 있을 테고 신장수는 조연쯤 될 것 같다. ’머리에 송낙을 쓰고 가사 장삼을 입은‘ 노장은 겨울을 상징하고 취발이는 여름을 상징하는데, 둘의 대결에서 취발이가 승리하여 풍농을 기약하는 구성이 극의 뼈대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두 인물의 대사가 많다. 양주와 송파는 같은 산대놀이이지만 양주에는 신장수라는 인물이 없다(비슷한 역할을 말뚝이라는 인물이 한다). 신장수는 신을 파는 장사꾼이다. 앞서 5장에 등장한 노장에게 신을 팔지만 돈을 받지 못하고 패배하는 역할이다. 패랭이를 쓰고 채찍을 들고 등장하는 신장수는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는데 등장 시에는 원숭이를 업고 나온다. 원숭이 역을 맡은 사람은 같은 과 4학년 선배 여학생이었다. 키가 자그마하고 체구가 작은 여학생이라 원숭이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학생이 생각보다 몸무게가 있어 체력이 부실한 나로서는 ’고역‘이었다. ’방만한 처녀‘를 업는다는 쑥스러움까지 더해져서 처음 한동안은 역할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여자 선배나 나나 익숙해지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난감하던 일들이 새삼스럽다. 각 과정마다 사설과 춤이 섞이는데, 물론 춤사위는 정해진 것이고 또 여러 시간을 공들여 연습한 것이기도 했다. 재담도 좋지만 탈춤의 묘미는 이 춤에 있는 것이다. 피리 · 장고 · 대금 · 해금으로 구성된 반주에 맞춰 추는 춤 양식은 양 다리를 굽혀 번갈아 차올려 뛰면서 한 팔로는 머리에 쓴 모자를 벗겨내는 듯한 몸짓과, 뒷짐을 지고 리듬에 맞춰서 몸을 일렁이는 춤사위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녹수청산 깊은 골에‘나 ’나비야 나비야 청산 가자‘ 같은 불림과 함께 덩실덩실 추는 춤은 참으로 흥겨웠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유연하기는커녕 ’나무 막대기처럼 뻣뻣하기 짝이 없는‘ 내 몸놀림이 춤을 제대로 감당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공연이 끝난 후 한동안은 몇 사람만 모이면 으레 누군가의 선창으로 어깨를 들썩이곤 했다. 노장 역을 연기한 키가 훤칠한 ㅇㅇ의 멋진 춤사위(그 긴 팔의 우아한 동작!)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마지막 8 과정의 무당 역을 자원해서 연기한 치과대생(남자) ㅇㅇ의 신들린(무당이니 신들린 것은 당연한데) 연기도 기억에 남는다. 공연이 끝난 후 관중들과 어울려 한바탕 신나게 추던 춤 장면도 어제 일 같다. 참으로 화창한 봄날의 신명 나는 밤이었다.
’나비야 나비야 청산 가자. 덩 더쿵 더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