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깨서 머리맡의 휴대전화를 켜니 2:40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새벽 2시 40분이다. 나는 ‘아차’ 하는 ‘낭패감’에 빠진다. 10분 뒤에 깼더라면 2:50일 텐데 또 4라는 숫자와 만나다니! 왜 이 시간에 잠이 깼을까? 아니 잠이 깼더라도 10분 뒤에 휴대전화를 열어보았다면 4라는 숫자는 피했을 텐데. 내가 4라는 숫자에 거의 노이로제라 할 만큼 집착한 것이 1년 반쯤 된다(이즈음 들어 다소 무뎌지긴 했다).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은 건드리면 화면에 시간이 표기되는 휴대전화와, 가동을 하면 시간이 표시되는 컴퓨터다. 유독 4라는 숫자와 맞닥뜨리는 빈도수가 너무 많다고 느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뿐 아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 멈춰 있는 층이 4층(이거나 14층)이고, 횡단보도 앞에 서면 신호등의 잔여 시간은 4가 들어간 숫자이다. 타야 할 버스나 전철 도착 시간이 4분 후이거나 현재 위치가 4전 정거장이다. 나는 왜 이렇게 4라는 숫자와 만나는 경우가 많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는 물론 4라는 숫자에서 받게 되는 불길함 같은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예로부터 우리는 죽을 4 자라 하며 기피하는 경향이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런 불안감을 ‘이토록 민감하게’ 느낀 계기가 된 건 1년 반쯤 전인데, 사진작가 구본창(금년에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호암 예술상을 받았다)의 기념전을 보고 나서였다. 작년 1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구본창 회고전은 반세기가 넘는 작가의 활동 내용을 총 결산할 만한 대규모의 전시였다. 전시 작품의 방대한 규모와, 우리의 전통문화(달항아리, 탈, 지화, 곱돌 공예품 등)와 현대사(한국전쟁 유물, 콘크리트 광화문 등)까지 망라하는 다양한 소재는 압도할 만한 것이었다. 그 많은 전시 작품 중에 숨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사진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작가의 아버지의 얼굴 모습을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이었다. 제목이 <숨>(1995년 작품)인데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다음 해에 돌아가셨다고 한다)를 기록한 작품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내적인 성찰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순환 속에 있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작품을 제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작가 아버지의 얼굴을 찍은 사진에(그 사진 속에 있었는지 그 옆에 별개의 사진이었는지는 내 기억이 분명치 않은데) 4:44(4시 44분)이 표시된 디지털시계가 있었다. 나는 전시회를 보고 나와서도 작가의 아버지의 사진과 4자가 3개 이어진 숫자(시간)가 머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때부터 앞에 적은 4자에 대한 강박감이 생긴 셈이다. 이런 증세가 (내가 생각해도) 좀 지나친 것 같아 애써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이런 사정을 이야기해 본 적이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은 현상들을 아빠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며 어이없어했다(누구나 하루에 몇 번쯤 4라는 숫자와 마주하는 일은 ‘확률적으로’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에 왜 그렇게 민감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의 건강(이듬해 9월에 100세로 돌아가셨다) 문제도 겹쳐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좀 별나게 작용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현상의 배경에는 청소년 시절의 가정환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서른아홉에 홀로 된 어머니는 꽤 오랫동안 무속과 점 같은 초현실적인 것에 의존했었다. 자잘한 생활 습관에서부터 중요한 행동 원칙까지 금기사항도 많았다. 청소년 시절에는 그런 어머니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어서 반발하기도 했는데, 세월이 많이 지나 나이가 들어서는 이런 어머니의 심정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우선은 젊어서 가정을 책임지고 꾸려나가야 했던 여자로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누군가와 상의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대부분 어머니 혼자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 사연도 어머니에게는 회한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해 전, 설 명절을 시골 큰집의 부모(내 조부모)와 함께 보내겠다고 귀향하려는 것(아버지는 한 번도 설을 우리 식구들과 쇤 적이 없다고 했다)을 어머니는 극구 말렸었다. 어머니의 꿈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다녀오신 (꿈에서의) 아버지 모습은 병색이 완연했다. 아버지가 하얀 두루마기 차림에 작은 보퉁이 하나를 들고 집 대문을 들어서는 꿈이었다. 어머니는 그 꿈이 못내 마음에 찜찜했다.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향했던 아버지가 며칠 뒤 어머니가 꿈에서 본 그 모습대로 돌아오셨다. “당신 모습이 왜 그래요?”라고 하자 ‘설 인사차 아무개(친척) 집에 들렀는데 거기서 먹은 밥이 체했는지 토사곽란에 시달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넉 달쯤 지나 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문상을 간 고향 친척 집에서 ‘살’을 맞은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귀신의 해코지’라고 믿었다(돌아가실 때까지 그랬다).
내가 청소년 시절 어머니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굿도 여러 번 했는데 어머니의 성화로 어쩔 수 없이 나도 그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무녀의 모습, 무당집의 무구들, 요란한 악기 소리, 억울하게 죽었다는 집안 누구누구가 (무녀의 입을 통해)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사연들, 그 억울한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퍼포먼스, 공수를 내린다면서 깃발을 뽑던 일(빨간 깃발이거나 파란 깃발) 같은 것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내 기억에 굿을 하고 난 후에도 크게 사정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은데도, 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어머니는 어디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내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쯤까지도 그랬다. 그러던 어머니도 차츰 무속에 대한 의존도가 줄더니 장년 이후에는 집에서 불경을 읽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때는 그런 ‘풍속’이 낯설지 않았다. 한이 많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많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전근대적인 가족제도로, 한국전쟁으로, 가난으로 희생된 사람이 많았다. 당연히 그 고통과 설움과 억울함으로 ‘희생된 자들의 한’이 많았다. 김열규 선생(작고)의 책 『한맥원류恨脈怨流』에 쓰인 ‘죽음이 곧 한의 시작이었으며 한은 죽음을 먹고 자란다’라는 말 그대로였다. 그 책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한국인은 단연 ’원한인‘이다. 그들은 서러움을 남달리 잘 타고, 원한을 남들보다 더하게 가슴에 끼고 사는 사람들이다. 굳어진 민족성이라고는 물론 말할 수 없으나 겪어온 역사로 인해서 우리들은 그렇게 마련된 삶을 살아온 것이겠다’. 유현목 감독이 만든, 아예 제목 자체가 <한>(1967?)인 옴니버스 영화도 있었다. 그래서 그 맺힌 한을 풀어야 했고 그런 역할을 무속인들이 했다. 때로는 한이 살아가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가난이 한이 맺혀’ 악착같이 돈을 벌었으며,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자식 공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시켰다. 내 어머니 같은 사람이 그런 시대를 산 분이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생관이자 삶의 방식이었다(언젠가 내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 넓적다리 살을 베어다가 팔더라도 너희들 학교는 시키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건 한국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독특한 기층문화의 한 부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4라는 숫자에 집착해서 불안감을 느끼는 내 모습에서 내가 얼마나 한때 과도할 만큼 주술에 의존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나도 모르게 받고 있는가(내면화되었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는 말을 하려다가 이야기가 이렇게 번지고 말았다. 한 시대의 문화적 속성과 또 개별적 환경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면 너무 아전인수격일까?
요즘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화제라고 한다. 영화에는 사자 보이스라고 하는 저승사자들이 나온다는데 우리의 독특한 민속 문화가 이제 보편성을 가지고 전 세계인에게 공감을 얻는 정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무엇보다 음악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가장 크겠지만). 무속에서의 한풀이 퍼포먼스도 음악에서의 신명도 어쩌면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새삼 우리의 독특한 한恨의 문화를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