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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Dec 22. 2021

다시 쓰는 일기 5 –2021.12.XX

겨울 산사에서

오늘은 동지冬至다. 동지는 24절기 중 22번째에 해당한다. 대설大雪과 소한小寒 사이에 있다. 양력으로는 12월 21일이나 22일이 되고 음력으로는 동짓달(11월)에 드는데 올해는 음력 11월 19일이다. 한국이 속한 북반구에서는 동지에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 예로부터 동지는 ‘작은 설’이라 부르며 축하했다. 음력으로 11월 10일이 되기 전에 드는 동지는 애동지(애기 동지)라 하고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老동지라고 부른다.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데 초순에 드는 애동지에는 어린이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팥죽을 쑤어 먹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팥시루떡을 해 먹었다. 올해는 하순에 동지가 드니 팥죽을 쑤어도 된다. 요즘은 애동지가 아니어도 동지에 팥죽을 잘 쑤어먹지 않는다.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가고, 다른 맛난 음식이 많아진 탓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말의 세시기( ことばの歲時記)』라는 일본 문고본을 읽은 적이 있다. 1년 365일을 각각의 날과 관련이 있는 단어 하나를 선택하여 그날에 얽힌 역사나 풍습, 풍물 등을 한 페이지 정도씩 적은 책이다. 그 책에 나오는 동지를 보면 일본에서도 동짓날에는 죽을 쑤어 먹거나 호박을 먹고, 유자를 넣은 자루를 욕조 물에 띄워서 유자의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를 맡거나 유자를 탕 안에 넣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풍습은, 동지라는 단어의 발음과 목욕으로 병을 낫게 한다는  의미의 ‘탕치湯治(토우지)’와 발음이 같은 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글이 이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할 자리는 아닌 것 같다. 동지라는 말을 들으면 황진이의 시조가 먼저 떠오른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시조 말이다. 또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라’는 우리 민요도 생각난다. 조선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에 보내던 사절도 동지사였다. 대개 동지를 전후하여 보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동지를 맞아 가까운 절에 다녀왔다. 노고산(한미산이라고도 한다) 흥국사다. 절에서도 동지는  행사로 여겨 여느 날과 다른 법회가 열린다. 우리나라에 흥국사란 이름을 가진 절이   있는  같다. 남양주시에도, 전남 여수에도 있다. 한미산韓美山(나는  이름이 좋다) 흥국사는 신라 문무왕 1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이다. 지난봄에 한번 왔었는데 집에서 멀지도 않고  깊은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청정하고 산사山寺다운 고요함이 좋았다.  뒤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풍경도 좋았다. 오늘은 동지여서 찾아온 사람들이 많아서 다소 번잡한 느낌이었다. 마침 절에서 준비한 팥죽을 공양할  있었다. 새알이 여러  들어 있었다.



금년에는 제법 여러 군데의 절을 다녔다.  달에   꼴로   같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독실한 불교신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럴 정도는 아니다. 불상과 사찰의 가람 구조나 불교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다. 오히려 , 구약 성서에 관한 책은 여러 권을 읽었지만 불경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  우연한 기회로 배운 『반야심경』을 조금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냥 절이 좋아 다난다.  탈속의 분위기를 좋아할 뿐이다. 인연이라고  만한 것이 있긴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땐가 부여의 고란사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당시 과외선생의 제의로 같이 공부하던 아이들  명과 함께였다. 고란사는 작은 암자이다. 어느 날인가 우리들을 독려하러 아버지가 오셔서 하룻밤을 지내고 가셨는데 아버지를  주지스님이 ‘당신은 수명이 짧을  같으니 절에 촛대 하나를 시주해주면 내가  기도를  주겠다 했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간 아버지가 어머니께  말을 했더니 뜬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찜찜하게 생각한 어머니가 종로3 (당시에 그곳에 불구상이 많았다고 한다) 나가 촛대 값을 알아보았으나 당시 우리 형편으로는 부담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어머니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냥 무시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년도   되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는 세월이 지나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와 둘이 강원도 오대산의 한 암자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스님 한 분만 계시는 작은 암자였다. 스님은 키가 크고 미남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스님은 당시 대학입학 에비고사에 실패한 후 영화배우 학원에 다니다가 입산을 했다. 스님은 4대 독자였다. 스님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입산했으니 아마 가족들은 스님의 행방을 알려고 사방으로 찾아다녔을 것이다. 스님과 같은 법명을 가진 다른 스님의 가족이 편지를 보내와 확인한 일도 있었다. 그 스님도 2대독잔지 3대독잔지,였던 것 같다. 두 달을 그 스님과 지내면서 그 스님에게서 많은 이야길 들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방에서 반찬 세 가지로 식사를 하고 마가목차를 마시면서 불교에 대해 (비유로 가득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가끔은 자신의 출가 전 이야기도 했다. 내게는 스님이 아직도 속세에 대한 미련(?)과 가족에 대한 가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당시 내게는 ‘인간적’으로 보였다. 암자 앞은 넓은 마당이었다. 한 여름의 땡볕이 내리쪼이는 그 마당은 흡사 빛바랜 창호지 같았다. 매미 소리마저 끊어진 오후 한때는 마치 저세상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서울로 오는 날 스님은 산 아래 도로까지 우리를 배웅했다. 그 산에는 키 작은 산죽이 무성했다. 도로 가까이까지 우리를 배웅한 스님은 합장으로 우리와 작별한 후 돌아서서 암자를 향했다. 길가의 무성한 산죽의 가지를 잡아채듯 꺾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참 등이 넓은 스님이었다. 이 두 인연이 내가 불교에 대해 가진 원형적이라 할 기억이다.     



요 며칠 V.S 네이폴의 소설 『미겔 스트리트』를 다시 읽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다. 지금은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포함되어 있는데 처음 나올 때는 이데아총서 시리즈의 하나였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보자 옛날의 기억이 떠올라 다시 꺼내 든 것이다. 책 뒤의 여백에 긴 독후감이 쓰여 있다. 1981년 11월 11일이라는 날자가 적혀 있다. 당시 꽤나 감동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새로 읽으면서는 도무지 그때와 같은 느낌이 오지 않았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감정이 무디어진 것일까? 독서 능력이 퇴화된 것일까?

취향이 달라졌을까? 참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 소설은 이상옥 교수의 번역인데 지금 봐도 번역이 참 잘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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