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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Nov 28. 2021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꽃밭에서>라는 동요의 1절 가사다. 검색을 해보니 어효선 작사에 권길상 작곡으로, 1953년에 만든 노래로 되어 있다. 요즘이야 아빠라는 호칭이 일반적이지만 그때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와 꽃밭을 만든 적은 없다. 가까이에 기찻길이 있던 집에서 살았는데, 닭을 키운 기억은 있어도 꽃밭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아버지라는 호칭을 생각하면 늘 이 동요가 떠오른다. 이 동요가 아버지와 함께하는 단란한 정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노래로 생각되어서였을까?



아버지는 내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서른여덟이었을 때다.

열두 살이면 웬만한 것들은 기억에 남아 있을 텐데,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많지 않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혼자 서울에 올라와 1년 정도를 막내 삼촌과 함께 지냈고, 가족들이 합류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병이 나 반년 정도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으니 아버지와 같이 보낸 기간이 길지 않은 탓인 것 같다. 아버지의 얼굴은 영정 사진 속의, 안경을 끼고 웨이브가 있는 숱이 많은 헤어 스타일의 모습으로만 떠오른다. 돌아가신 달은 5월인데 사진 속의 아버지는 겨울 외투 차림이었다. (사진첩들이 든 상자를 잃어버려서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키가 큰 편이었고 골격은 작지 않았지만 마른 체격이었다. 어려서부터 건강한 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잘한 병치레가 잦았었다고 한다. 열두 살이면 적은 나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철이 빨리 든 아이라면 웬만한 시건은 들었을 법한 나이일 수도 있겠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내 태도가 주변 친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던 것 같다. "제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귀여워했는데 애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내 기억에도 상복을 입고 상주 노릇을 하면서도 그냥 주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실감이나 슬픔 같은 걸 느끼지는 못한 것 같다. 아마 까칠하고 매몰찬 내 성격 탓일 것이다.



아버지는 5형제 중 둘째였다. 백부는 중등 과정을 마쳤고, 세 동생들 모두가 대학을 졸업했지만 아버지만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다. 조부가 양조장을 가업으로 일으켜 그러저럭 먹고살 만은 했다고 하는데, 유독 아버지가 학교를 다닐 때에 가세가 많이 기울어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말기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훗날 어머니께 들은 얘기로는 초등학교 시절도 대부분 '길에서

울면서 보냈다'라고 했다. 월사금(학비)을 내지 못한 아버지를 학교에서는 돈을 가져오라고 집으로 쫓았고, 할머니는 쫓겨온 아버지를 야단치며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는 나날이었으니 길에서 오가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다. 끼니를 이을 곡식이 없을 때는 가마솥에 물을 끓여 연기를 내서라도 동네 사람들에게 굶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조모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백부가 이어받은 양조장(그때는 술도가라고 했다)에서 물지게 지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다가, 20살에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한동안은 양조장에서 일하다가 분가를 했다. 따로 살림을 난 후 철도국 직원으로 잠시 일한 기간을 빼고는 특별한 직업을 갖지는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아버지는 여리고 섬세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 영화 본 줄거리를 이야기할 때는 어찌나 실감 나게 전달하는지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만

보면 영화 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내게 뚜렷한 기억은 없으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아버지는 영화나 가요 등 대중 예술 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고, 다소의 재능도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버지를 따라 당시 유행하던 임춘앵, 김진진 등의 국극을 구경한 기억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 가운데 공통되는 것 중 또 하나는 아버지의 효심이었다.  5형제 중에서도 조모에 대한 효성이 가장 지극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가끔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같이 산 스무 해 동안 가족이 함께 설을 쇠 본 적이 없었다고. 어느 한 해 빠짐없이 설 전날이면 고향으로 귀성을 해서 부모님과 함께 설을 보냈다. 돌아가신 그해 설도, 예년과 달리 왠지 기분이 꺼림칙하던 어머니가 극구 만류를 했었지만 뿌리치고 고향으로 설을 쇠러 가셨는데, 고향에서 병을 얻어 돌아오신 후 결국 일어나지 못하셨다. 인정도 많았던 것 같다. 나와 동갑인 큰집 사촌이 있는데 양말 하나, 옷 하나를 사도 꼭 그 사촌 것까지 두 벌을 샀다.

언젠가 어머니가 내 것만 사 왔다가 아버지께 혼이 나서 똑같은 걸 다시 사 와야 했다는 말씀도 하셨다.

집안 친척들에게도 너무 자상했던지라 돌아가시고 난 후에 모두가 안타까워하고 애석해했다.

집안 장손으로 나보다 9살 위인 사촌 형님은 '작은 아버지 따라가겠다'라고 관을 붙잡고 몸부림을 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장남인 나를 끔찍이나 사랑하셨다. 평소 딸을 원하셨던 아버지는 나를 마치 딸 기르듯이 갈렀다. 용모나 옷차림을 가꾸는 데 정성을 쏟았다. 지방 중소도시 초등학생 치고는 눈에 띄게 치장을 시키신 것 같다. 아마 일찍 서울로 전학을 시킨 것도 아버지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연을 알고 있는 친척들은 지금도 나를 보면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한다. 아버지가 돌아기시고 난 뒤 한동안 "네 아버지가 너를 놔두고 어찌 눈을 감았겠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었다. 여섯 살 아래인 남동생을 낳았을 때 아버지는 딸이 아닌 것을 그렇게 서운해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네 동생은 너에 비하면 아버지 사랑을 10분의 1도 받지를 못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암 판정을 받아 가망이 없음을 통보받은 아버지는 주변에서 권하는 수술을 거절하셨다.  수술을 하면

6개월 정도 생존 가능성을 예상했지만 아버지는 남은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마치고 싶다고

했다. 동숭동 산꼭대기 방 두 칸짜리 바깥채에 살 때였다. 겨우 어머니 부축을 받아 마당 한 편의 화장실에 가신 어느 날, 아버지는 화장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께, 모든 짐을 어머니께 맡기고 먼저 가야 하는 미안함을 말씀하시면서 아이들 잘 키우라는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가슴에 카네이션 하나 달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아버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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