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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Nov 26. 2021

다시 쓰는 일기 1 - 2021. 11. XX

인사동에서

아침 기온이 영하 2도라고 한다. 며칠 전에 산 ‘목티’를 꺼내 입었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 블로그 글감 찾기가 주된 목적이다. 한 주에 하나씩은 써야 한다는 강박감이 밖으로 내몬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블로그에 글 쓰는 일이 말년의 소소한 즐거움이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부담이 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번엔 무얼 쓰지? 고민이 도를 넘으면 이건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다. 그리고 무리수를 두게 된다. ‘글을 위한 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글이 남에게 감동(은커녕 관심)을 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저절로 글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열흘에 하나 쓰기도 쉽지 않다. 즐거움과 억압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맞추는 일, 그게 관건이다.     






안국역을 목적지로 지하철 3호선을 탔다. 평일 오전이라 차 안은 복잡하지 않다. 노약자 우대석은 비어있다. 그렇지만 굳이 일반석 빈자리를 찾아 끼여 앉는다. 내놓고 노인 딱지 붙이는 게 싫기도 하지만, 누군가 옆자리에 앉을 ‘어르신’이 꺼려진다. 목청 높여 전화 통화하고, 유튜브 왕왕 틀어놓고 정치 방송 듣거나, 아니면 흘러간 옛 노래·····. 이런 불상사를 만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말이다. 일반석은 어떤가?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스마트폰 삼매경이다. 나는 늘 궁금하다. 저 사람들은 무얼 저렇게 열심히 보는 걸까? 게임? 드라마? 영화? 카톡? 동영상 강의? 정보 검색? 나는 전철 안 1시간 동안 휴대전화를 꺼낼 일이 거의 없다. 어쩌다 전화가 오면 ‘낮말은 새가 들을세라’ 기어드는 목소리로 "지금 전철 안이니 나중에 다시 하자"는 말 한마디거나, 한, 두 번 메시지 확인 이외에는 휴대전화는 내처 주머니 속에 있다.     

안국동에 온 것은 지난주 이곳을 지나다가 포스터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을 한탄한 시인 김수영 탄생 100주년 기념전 안내 포스터였다. 혹시 그 기념전을 블로그 글감으로 활용할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에서 찾아온 것이다. 몇 달 전에 김수영 시선집 『거대한 뿌리』(민음사 발행)를 베껴 쓴 적이 있어서 더욱 솔깃했다. 장소는 인사아트플라자 5층으로 되어 있다. 장소를 찾아가니 카페였다. 카페 사방 벽에 글과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박재동 화백이 그린 시인의 초상화와 김 시인의 시에 붙인 그림 등 14명의 예술인들의 글과 그림들이다. 대학 다닐 때 학교 앞 찻집에서 본, 한 학년 선배의 시화전 생각이 났다. 나중에 꽤 유명한 시인이 된 사람이었는데, 7, 8년 전인가 세상을 떠났다. 차 한 잔 마시지도 않으면서 구경하고 사진만 찍고 나오는 게 민망해서 카운터로 가서 ‘공손하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 건물 1∼4층에서도 다른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중 알 만한 이름이 적힌 전시회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계간지 <창비>의 주간(발행인?)이기도 했던 미술평론가 김윤수 3주기 추모전으로 마련된 전시회였다. 선생의 친필 글씨와 유품도 있었다. 생전에 선생이 관심을 가졌던 ‘리얼리즘’ 미학의 그림들이 대거 전시되어 있었다. 약 100명에 가까운 화가들이 참여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림들을 둘러보고 선생의 초상화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전시회 두 개를 보았지만 블로그 쓸 만한 재료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시간도 겨우 12시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도 허탕을 친 셈이다. 어슬렁어슬렁 정독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금년에 개관한 공예박물관이 호기심을 끌었지만 나중에 아내와 함께 가보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정독도서관은 한동안 인문학 강좌도 듣고 문화교실에도 다녔던 곳인데 코로나19가 시작되고부터는 거의 발걸음을 끊었다. 도서관 못미처 김밥집에 들어가 김밥 한 줄로 점심 요기를 했다. 전에도 가끔 들렀던 곳이다. 현금 4,000원을 지불했다. 도서관 입구에서 코로나 QR 코드 찾느라 애를 먹고 난 뒤 겨우 안으로 들어갔다. 인문과학 열람실에 들어가 융의 저작집 한 권(『원형과 무의식』)을 꺼내와 몇 장 읽어보았다. 최근에 그의 자서전 『꿈 기억 사상』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2002년에 나온 책인데 활자가 작고 글자 수도 빽빽하다. 눈이 침침하다.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책상 한쪽에 밀어놓고 이현우의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을 꺼내 왔다. 대상이 된 10편의 한국소설 중 이승우의 「생의 이면」만 빼고는 다 읽어 본 것들이다. 재미있다. 두 편을 읽은 후 ‘이건 나중에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와 제대로 읽어보아야지’하고는 제자리에 갖다 놓고 열람실을 나왔다. 자판기에서 믹스커피 한 잔을 빼서 들고 앞마당 벤치에 앉았다. 쌀쌀한 날씨다. 날씨가 좋을 때는 구경 온 사람들로 붐비는 곳인데 한산하다. 3시쯤 되어 안국역으로 가서 3호선을 탔다. ‘삐삑’ 두 번 울리는 전철 카드 소리를 누가 들을세라 얼른 개찰구를 빠져나가 승강장으로 갔다. 오늘도 별 소득 없이 보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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