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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Nov 30. 2021

북해도 추억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1년 3월 말부터 1년 남짓한 기간을 일본 북해도 치토세시(千歲市)에서 살았다. 우연히 신치토세공항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서였다. 나는 1980년대 후반 약 3년 반, 그리고 2011년 치토세 주재 기간을 포함하여 모두 7년 남짓한 세월을 일본에서 지냈다. 그중에서도 이 치토세시에서 보낸 길지 않은 기간을 잊을 수 없다.



치토세시는 인구 약 9만 명의 작은 도시다. 당시 북해도는 전체 인구가 2백만 명이 될까 말까 할 만큼 면적 -남한 면적의 3분의 2-에 비해 인구 밀도가 낮았다. 그나마 치토세시에는 신치토세공항이 있어 다수의 공항 상주인력과 자위대 근무 인원들을 포함한 숫자이니 실제 토박이 주민들은 헐씬 적은 숫자일 것이다. 내가 살던 곳은 치토세 시청 옆 5층짜리 '만손'이었는데, 방 하나에 주방을 겸한 거실이 있는, 일본식으로 말하면 1LDK의 좁은 공간이었다. 단신 부임자가 많은 북해도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거 형태다. 집에서 JR 치토세역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차도를 만나기 전까지 치토세내(千歲川)를 따라 걷는 길이 좋았다. 봄이면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들이 평화로운 봄날의 운치를 더했고, 주택가 옆  빈터에는 동네 주민들이 가꾸어 놓은 꽃밭이 아름다웠다. 치토세내에는 산란기가 된 연어가 올라오기도 한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겨울에는 길 양옆으로 둑이 쌓일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치토세역에서 종착역인 삿포로까지는 네 정거장이었다. 신치토세공항에서 삿포로까지의 열차 노선을 '치토세선'이라고 불렀다. 쾌속선인 치토세선의 소요 시간은 35분이었다. 삿포로에서는 오타루 등 그 밖의 북해도 여러 지역으로 노선이 연결된다. 치토세역 광장에는 높다란 빌보드 안내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안내판에는 삿포로 출신의 소설가 와타나베 준이치의 에세이집 『북국통신北國通信』에 나오는, '어릴 때부터 나는 치토세선이 좋았다(子供のときから、僕は千歳線といねが好きだった.)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지금은 다른 내용의 빌보드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북국통신』은 북해도 출신의 작가 (작가는 삿포로 의대 출신이다.)가  북해도의 사계절과 음식 등의 풍물에 대해,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쓴 에세이집이다. 1989년 처음 일본에 갔을 때 구입한 문고본으로, 서투른 일본어 실력에 사전을 찾아가며 야금야금 읽던 책이었다.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치토세에서 공항까지 기차를 탄 횟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다. 일본의 기차 안 풍경은 어느 노선이나 할 것 없이 비슷하다. 정차 후 기차가 출발하면 행선지 안내를 시작으로 교통약자석 주위에서는 휴대폰을 끄고 그 밖의 장소에서는 진동 상태로 바꾸라, 교통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등의 '부탁 말씀'을 거의 매 정거장마다 반복한다. 지금도 나는 안내방송 전체를 거의 외울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치토세는 정말 쓸쓸한 도시다. 밤 8시쯤이면 이미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고, 가끔 군고구마나 떡 등을 파는 장사꾼들이 외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할 뿐이었다. 10월 하순이면 벌써 겨울 날씨로 접어들고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북해도의 눈은 한마디로 무섭게 내린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가 어느 책에선가 표현한 대로 '착하게 아니면 미친 듯이' 내린다. 특히나 소리 없이 조용하게, 착하게 내리는 눈이 무섭다. 한밤중에 잠이 깨서 창밖을 내다보면 굵은 눈송이들이 자욱하게, 하늘을 가득 채우고 내린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깨서 밖을 내다보아도 그 기세는 여전하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내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밤새 두, 세 번을 깨다 자다 새벽이 되어 밖을 내다보면 대개는 거짓말처럼 눈은 그쳐 있고 날씨는 화창하다. 기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가에는 가지가 휠 정도로 눈을 얹은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온 세상이 말 그대로 설원雪原이다.



치토세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마련해준 송별회에서 나는 이런 인사말을 했다. "내게 북해도는 어릴 때부터 꿈의 고장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유정』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유정』은 이광수라는, 굳이 비교하자면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같은 한국의 작가가 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워낙 오래 전에 본 영화라 그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이 눈이 쌓인 산장으로 연인을 찾아가는 장면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장소는 현지 촬영한  일본 북해도였습니다. 그 뒤부터 북해도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난 1년 간의 북해도 생활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 쓸쓸하고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적막함, 그리고 눈부신 백설의 풍경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충 이런 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꽤나 감상적인 인사말이었다.



북해도에서 살면서 몇몇 유명 관광지를 가보기는 했다. 일본 3대 온천 중 하나라는 '노보리베츠 온천', 운하의 도시 '오타루', 여름이면 라벤더 꽃이 만발하는 꽃동네 '후라노'와 '비에이', 치토세 인근의 '시코즈코'같은 곳이다. 물론 이 밖에도 '니세코', '도야코', 시레도코(가토 도키코의 <시레도코 여정>이라는 노래로 유명하다) 등 광활한 자연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 북해도다. 하지만 나는 그 적막하고 쓸쓸한 치토세시에서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몇 년째 한일 양국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전염병의 발발로 서로 간의 내왕은 언제 다시 활발해질지 기약이 없는 상태다.

 쓸쓸한 치토세 거리와 눈과 기차, 치토세 공항 지하 상가의 '소바', 공항 대합실  구석에 있던 짭쪼롬한 일본식(和風) 스파게티집, 살던 집에서 가깝던 정갈한

초밥집, 모두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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