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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Jul 04. 2022

말(言)에 대해서 생각한다

너만 알고 있어라

 며칠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가까운 지인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느낀 것이  계기였다. 지방에서 살고 있는 그분은 오래전 인근 산속에 마련해  오두막집(본인 표현)에서 주말을 보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전화를  그날도  오두막집에서였다. 나는 ‘부럽다 덕담(?) 함께, 하는  없이 빈둥거리며 ‘남아도는  시간인데 가보고 싶어도   된다 했더니 그분은 ‘언제고   때가 있겠지요, 하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그분이 전화로 물어온 사안에 대한 답변 등을 주고받은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분의 오두막집에 대한 ‘언제고   때가 있겠지요라는  때문이었다. 따져 보면 하등 마음에 거리낄  없는 일상적인 인사말 같은데 나는  말이 가슴에 남았다. 아마 내가 무의식적(?)으로 기대한 말은 ‘  오세요, 좋은 공기 마시고 스트레스도 풀고요정도의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얼씨구나 하고 서둘러  것도 아니겠는데, ‘언제고  때가 있겠지요라는 대답은 ‘그리 환영하는 마음은 아닌 모양이구나', 하는 추측을 하게 했다. 어쩌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가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을 듣는 사람의 곡해나 오해 같은 것을 포함하여 말에 대한 런저런 생각을  보게 했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거나 ‘말이 비수가 된다’는 등 말에 얽힌 속담과 격언이 많은 건 말이 상대에게 주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거창한 예를 들 것까지도 없이 일상으로 주고받는 평범한 말 한마디도 상대에 따라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요즘은 말보다 문자를 더 많이 주고받는데 휴대전화로 주고받는 문자 역시 말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구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문자도 최소한의 문장 형식을 갖춰 쓰는 경우가 많다. 그게 꼭 예의라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버릇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종종 상대방의 답장에 허탈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를테면 서너 줄의 문장(받침까지 빠뜨리지 않고)에 대한 답변이 ‘그래’, ‘네’, 그도 아니면 이모티콘이나 상투적인 사진(영상) 한 장으로 돌아오면 참 맥이 빠진다. 내 또래의 친구들 가운데에도 그런 경우가 많다. 바쁜 세상에 언제 문장 만들어 보내느냐고 힐난하며 나를 IT시대의 시대착오자 취급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마음은 석연치 않다. 내가 문제인가.     



며칠 전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동료 직원 4명이 만났다. 근무 부서는 서로 달랐지만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데다 퇴직 후 다시 일한 작은 회사에서도 동료가 된 인연으로 한 해에 서, 너 번쯤 만나는 사이다. 알고 지낸 시간이 오래이기도 하지만 사는 형편도 비슷하고 성향도 비슷한지라 만나면 체면 차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사이다. 그날도 그랬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렇기도 하겠고 코로나 시대에 사람이 그리워서이기도 하겠지만 서로 자기 말을 하느라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부족했다. 모두 다 어찌 그리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다른 사람의 말을 끊고 들어가기 일쑤다. 마치 노래방에 가면 남의 노래가 다 끝나기도 전(반주가 계속 흐르는)에 자기 신청곡을 입력하듯이, 아니 자기 노래 고르느라 남의 노래는 듣지도 않는 것처럼. 모임이 끝나고 돌아올 때면 늘 후회되는 일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인 것 같다.  오가는 문자를 보면 반성 일색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자신이 말하기보다는 묵묵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오늘 내 행태를 반성하며 그 말없이 들어주기만 하던 사람을 떠올리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대화를 하다 보면 이런 경우도 있다. 내 이야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화제를 돌려버린다.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잖아’ 하면서. 적어도 화제의 한 꼭지가 마무리될 즈음에 지적해도 될 것을 갑자기 차단기를 내리듯 중간에 잘라버리는 것이다.. 아니면 A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인데 느닷없이 B에게로 화제를 돌리거나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인데 ‘이제 그만 일어나자’고 해서 당사자를 머쓱하게 만드는 등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는 대화는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하는 일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A에게 B의 이야기를 하면서 ‘너만 알고 있어라’, ‘B에게는 말 하지 마' 하는 경우.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옳지만 사람은 입이 간질거려 참질 못한다. B에게 전달될 것을 우려한다면 말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이런 말투는 A를 불신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말을 말든지 말을 하고 싶으면 굳이 이런 전제는 붙이지 않아야 한다.   



『열국지』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오자서가 공자 승을 데리고 초나라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다가 강에 이르렀는데 건널 길이 막막했다. 그때 한 노인 어부가 배를 저으며 다가오기에 구원을 청했다. 어부는 추격 병사에게 발각될 것을 우려해 근처의 갈대숲에 숨어 있다가 저녁에 다시 나오라고 했다. 어두워지자 노인은 강기슭으로 배를 몰고 와 오자서를 안심시키고 마을에 가서 먹을 것까지 구해 와서 두 사람에게 대접했다. 노인은 이미 오자서를 알아보고 그가 초나라가 찾고 있는 수배자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강 건너로 데려다주었다. 오자서와 공자 승은 답례로 오자서의 (보석이 달린) 패검을 풀어 주려고 했지만 노인은 ‘그대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이 가여워서 강을 건네준 것뿐’이라며 받지 않았다. 노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배에서 내려서 서둘러 가던 오자서가 다시 돌아와 노인에게 ‘자기를 만난 일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말은 이미 이전에도 했던 말이었다. 노인은 오자서를 보낸 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나는 그대에게 덕을 베풀었는데 그대는 나를 의심하는구려. 만약 추격병이 다른 곳으로 건너가서 그대를 잡는다 해도 나의 결백함을 어떻게 밝힐 수 있겠소? 차라리 내 한목숨을 바쳐 그대의 의심을 풀어드리겠소.”라는 말을 마치고 배를 뒤집어 강물 속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말의 소중함에 대해서는 많은 격언과 우화, 설화를 통해서 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말을 하고 지낼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기 전에 먼저 생각하는 버릇을 키워야겠다. 내 말이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를 잠깐이라도 생각해 본 후에 말하기, 아예 8을 듣고 2만 말하는 훈련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내 스스로에게 다짐해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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