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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Aug 01. 2022

글에 대해서 생각한다

'문장이 진부하다면 그건 나 자신이 진부한 것'

 ‘말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글을 쓰고 나서 글에 대한 생각도 써보고 싶어져서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았다. 그러나 내게는 힘에 부치는 제재여서 문득문득 떠오른 단편적인 생각들만 메모해 놓은 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주 중앙일보에 실린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의 에세이를 읽고 유치하긴 하지만 글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고 싶어졌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같은 일반인들도 이왕이면 좋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 비록 보잘것없는 아마추어이지만 나 역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는 바에야 어찌하면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리가 없다. 글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잘 써질 수도 없고 또, 비록 꾸준히 독서를 하고 글쓰기 훈련을 해 왔다고 해서 꼭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훈련을 넘어서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으면서도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우선 기본적으로 문법에 맞는 문장을 써야 하기 때문에 애매하다 싶으면 사전 등을 찾아 검색을 하고 바로잡는다(늘 종이사전을 옆에 두고 고전 읽듯 ‘독서’하는 문인들처럼은 하지 못하지만). 우리말 지식을 쌓기 위한 노력도 한다. 신문에 실리는 ‘우리말 바루기’같은 기사를 스크랩해서 익히고, 소위 ‘일급 문장가’라고 칭송받는 문필가들이 쓴 ‘문장 독본’ 같은 책도 열심히 읽는다. ‘부사와 형용사는 가급적 쓰지 마라’, ‘문장은 짧을수록 좋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자어보다는 그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을 쓰라든가, 같은 단어를 중복해서 쓰지 말고 같거나 비슷한 의미의 다른 단어를 찾으라, 구두점 등 문장 기호를 정확하게 사용하라 등등의 기본 요령도 실천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문장은 불만스럽다. 이와 같은 노력들은 최소한의 정확한 ‘문장’을 쓰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우리나라 문필가 중에 글을 잘 쓰기로 소문난 분들이 있다. 황현산 교수(작고)와 소설가 김훈 같은 분들이 금방 떠오르는데 그분들 책을 읽고 또 읽으며 흉내(?)를 내보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문장이 손끝에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황현산 교수는 어느 글에선가 ‘진부한 표현을 버리고 진부한 시선을 바꾸어 오래 사물을 보고 있으면 그 사물이 새롭게 들어오고, 그래서 새로워진 사물을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프랑스 작가의 말을 환기시키며 ’새롭게 보기‘를 강조했다. 그런데 그게 간단한 일인가. 어떤 단어는 자동적으로 ’상투적인‘ 표현을 끌고 나온다. 세월은 ’흐르고‘, 물결은 ’치고‘, 비는 ‘억수 같이 내리고’, 살결은 ‘백옥’ 같고, ‘눈처럼’ 희거나 ’피를 토하는 심정‘ 같은 표현이 제일 먼저 치고 나온다. 그걸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보려고 애를 써 봐도 비슷한 표현들만 입안에서 뱅뱅 돌 뿐이다. 감수성이 무디다거나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자탄만 반복할 분 나아지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이은혜 편집장의 글이 뒤통수를 세게 쳤다.      



우선 이은혜 씨는 글을 참 잘 쓴다. 언젠가 딸아이에게 이 말을 했더니 “아빠 웬만한 출판사 편집장은 작가 뺨치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에요”한다. 그 이은혜 씨가 최근에 쓴 ‘현재를 쓰는 감각’이라는 글은 그분의 글 솜씨 이전에 내용 자체가 나 같은 개인적인 회고 투의 글을 주로 쓰는 사람이 새겨들어야 할 만한 근본적인 것이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우선 에세이에 나오는 몇몇 주목할 만한 문장들을 옮겨 보자.

‘회고적 에세이는 내 의도대로 쓰이는 것이 아니며, 결과물이 얻어내는 것은 고작 기억과의 투쟁 속에서 조금 확장된 인식의 지평 정도다.’ ‘회고는 재의미화의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을 겪었던 당시와, 생배추처럼  날것의 재료를 소금물에 담가 숨죽이는 작업을 하는 ‘쓰기’ 사이에 일정한 간극이 필요하다.‘ ‘책읽기가  돌아보는 틀을 제공한다면, 글쓰기는 틀을 행위로 바꿔내는 작업'이다.’ 회고적 글을 쓰면서는 ‘내가 아닌 것처럼 나를 투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부도덕한 자신도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 등등이다. 하지만 이런 지적들은 회고적 에세이를 쓰는 자세와 진실성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 같은 것이어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하는 정도로 넘어갔는데, ‘사유의 전개는 문장 안에서 이뤄진다. 문장이 진부하다면 그건 나 자신이 진부한 것이다’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철렁(?)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글에 대해서 뭔가 생각해보려고 한 건 바로 이 대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부한 문장’이란 가식적인 문장,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문장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문장이라는 단어를 글이라는 단어로 옮겨 놓으면 더 적절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좋은 ‘글’을 쓴다고 할 때와 좋은 ‘문장’을 쓴다고 할 때의 표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이다. 문장이라고 하면 뭔가 부분적이고 기술적이며 문체적 특성 같은 것으로 생각되고, 글이라고 해야 개개의 문장들로 엮어지고 어우러져서 전체적인 의미를 주는 것 같이 여겨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TV 같은 데서 가끔 보는 시골 노인들의 글이 감동을 줄 때가 있다. 그분들의 글은 맞춤법도 엉망이고 문맥도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좋은 문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내용에서 풍기는 진솔함과 순수함이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문장이 아니라 글 전체에서 감동을 받는 것이다. 글이란 문장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너무 신경질적인 반응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나는 이은혜 씨의 글에서 ‘문장’을 ‘글’로 옮겨 놓고 여러 번을 곱씹어 읽어보았다. 글을 쓴다는 게 단순히 기술적인 훈련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없는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거듭 확인하면서 깊은 사유가 없다면 결코 좋은 글은 쓸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깊은 사유라는 어려운 말을 썼지만 그건 결국 세상과 자신, 삶과 사람을 보는 깊은 안목을 말하는 것일 테고 좋은 글이란 그런 사유의 결과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을 통해 남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풀어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글을 어디 아무나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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