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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Sep 29. 2022

가을에 쓰는 편지

Y에게

우리가 마지막 만난 게 언제였던가. 학교 문을 나온 지가 사십 년이 넘었으니 아마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겠지. 아니, 졸업을 한 후에도 두, 세 해쯤은 보았을지도 몰라. 너무 오래전 일이라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 연극 공연장 같은 데서 보지 않았을까? 정말 많은 세월이 지났어.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연극반에서였지. 나이는 내가 자네보다 많았지만 같은 학년이었고 또 연극반은 자네가 나보다 선배이기도 했지. 우린 처음부터 말을 텄어. 나는 웬 만 해선 남에게 말을 놓지 못하는 성격인데(직장에 다닐 때도 한참 어린 후배들에게도 말을 놓질 못했지) 아마 그때 자네가 먼저 말을 놓았던 것 같아. 그에 따라 나 역시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지. 용모가 준수하고 목소리까지 타고났던 자네는 주역을 도맡아 했었지. 반면 연기에 별 재주가 없던 나는 단역을 한두 번 하고는 기획이나 무대감독 같은 스탭 일을 주로 했었고. 우리가 만들었던 몇 편의 작품 제목이 새삼 떠오르네. 창작극도 있었고 번역극도 있었지. 우린  서로 비슷한 데가 참 많았던 것 같아. 가정형편도 그랬고 내향적인 성격도 그랬던 것 같아(자네는 내면적으로 곧고 강한 면이 있었지만).

물론 자네나 나나 자신의 집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어. 서로가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닌 것 같다는 짐작은 하고 있었지. 어쩌면 그게 우리를 각별하게 묶어준 한 요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도 선연히 기억나는데 봄, 가을엔 자넨 늘 회색 점퍼 차림이었지. 마치 유니폼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나 또한 일 년의 반은 화이트 그레이 색 코르덴 바지 하나로 살았었고. 자네나 나나 그때 우리 삶의 전부는 연극반에 있었던 것 같아.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대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도 궁핍하고 외로운 시절이었던지라 오로지 연극반 생활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찾고자 했었지. 수업은 뒷전이었어. 그래도 낙제를 하지 않고 제대로 졸업한 것이 용해.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일 거야. 그때도 ‘깐깐한 학과’에 다니던 후배 B는 연극하느라(출석 일수가 모자라)  유급을 당하기까지 했잖아. 자네와 나를 비롯한 남학생 몇은 공연 연습 기간이나 공연 기간은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도 수업이 없을 때면 서클룸에서 살다시피 했고, 학교 앞 막걸릿집에서 술추렴을 하다가 밤이 늦으면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 다시 학교 서클룸에서 밤을 새우던 게 일상이었지. 술값은 으레 여유 있는 여자 후배들의 몫이었고.  



이제 와서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봄날’은 그때였던 것 같아. 사실 나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정말 많은 방황 속에서 살았거든.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등 가정적으로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데다 생활은 어려웠고, 과장된 피해의식과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불만과 설움, 소외감 같은 것에 짓눌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거듭된 입시 실패에 따른 좌절감에 시달렸었거든. 그러던 것이 대학에 들어와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내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지. 그곳에서는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었고 내 존재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좋은 친구들을 만났거든. 나는 연극반 생활을 통해서 자신감을 찾았던 것 같아. 또한 연극반 경험은 (비록 남다른 재능은 없었지만)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에 눈 떠서 이후 평생 동안 뗄 수 없는 취미가 되는 계기가 되었지.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들은 이후의 내 인생에 정말 큰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었어. 지금도 그 시절의 공연 팸플릿들과 사진들을 들쳐보면 그 아득하고 먼 시간 속의 모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자네, 기억나나? 첫 학기 공연이 끝나고 소백산으로 MT를 갔던 일 말이야. 소백산에서 내려와 영주의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냈잖아. 당직하던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었지. 그때 그 선생님과 같이 소주를 마시며 밤늦게까지 토론했던 기억이 날 거야(지금 같으면 어림이나 있었겠어?). 그런데 다음날  중앙선 일부 구간이 불통이 되는 바람에 대전을 거쳐 청량리로 오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했었지. 전날 내린 폭우 때문이라고 했지. 가진 돈을 다 써버린 터라 차비를 마련하겠다고 몇 사람 씩 흩어져서 대전역 광장에서 차비를 구걸했던 기억이 나네. 우여곡절 끝에 청량리 행 기차를 타고 오면서 사고 친 일 기억하지? 혈기에 넘쳤던 우리는 기차 안에서 기타 반주에 맞춰 합창을 하며 소란을 피웠었지. 주변의 어르신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라는 것도 아랑곳없이 방자하게 놀다가 청량리역에 도착했을 때 신고를 받고 기다리던 공안(그때 그렇게 불렀다)에게 넘겨졌고, 결국 우린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날 밤을 보냈었지. 우린 훈방으로 풀려나왔지만 자네와 H는 즉결재판에까지 넘겨졌잖아. 이제 와서 생각하면 참 철없는 행동이었지.      



2학년 겨울방학  단막극  편을 가지고 지방 공연을 갔었던  기억나? 가톨릭회관 강당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나는 공연보다도 우리가 그때 부르던 찬송가가  자꾸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 자네나 나나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 높은 곳을 향하여 언제나 나아갑니다.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하고 시작하는 노래 말이야. 아마 그때 교회에서 들었던 노래 같은데  노래가  그리 가슴에 사무치게 들렸던지. 지금도 나는 가끔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있어. 그러고 보니 자네가  부르던 노래가 생각나네.  송창식의 「걷지 말고 뛰어라」라는 곡이었지. ‘우리는 언제나 꿈을  때는 해왕성 명왕성   우주로 오오오 시작해서 ‘천국 가는 계단을 뛰어서 가자. 걸어서는  되지 뛰어서 가자 헤이헤이헤이 헤이헤이헤이 끝나는 노래 말이야. 자네가  노래를 시작하면 어느새 우리 모두 따라서 합창을 하던 기억이 . 특히 마지막 부분에는 악을 쓰듯 목청을 높여 불렀지.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 정말 그리운 날들이군. 나는 전에 연극반 시절의 추억을 블로그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목을 「너무 멀리  이제는 돌아갈  없는」이라고 붙였었네. 아는지 모르겠네만  문장은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산문집 『젖은 신발』의 표지에 쓰인, ‘너무 멀리  이제는 돌아갈  없는 그리운 날들!’인데, 염치 불고하고 빌려(?)  것이지.      



같은 시기에 연극반에서 동고동락한 선, 후배 몇 명은 자주는 아니지만 지금도 모이고 있지. 코로나19 이전에는 한 해 서너 번은 만났는데 전염병이 퍼진 이후론 그저 한 해에 한, 두 번이나 될까. 코로나가 우리 삶의 양태를 완전히 바꿔버린 것 같아. 모임이 있을 때 가끔 자네 얘기를 하지.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자네는 무슨 연유에서였던가 해직교사가 되었다는 말은 풍문으로 들었어. 벌써 오래전 이야기라 그 후로 복직이 되었는지 후일담을 아는 사람은 없더군. 어찌 그리 철저하게 소식 끊고 지내는지 때로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어. 옛날 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새삼 보고 싶은 얼굴들이 떠오르는군. S, B, H·, 그리고 이미 이 세상에 없는 L과 K …..많이 그립네. 풋풋한 청춘의 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하게 해 준 소중한 친구여, 이 가을 편지를 쓸 수 있는 행운을 준 자네에게 감사하네. 늘 건강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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