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단상 5
만혼 · 미혼 · 비혼이라는 말이 일상어처럼 들리는 시대인데 왜 이리 결혼 초대 소식은 많은가.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우리 결혼합니다’라는 알림이 하나 둘 카톡방에 뜨기 시작한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 가슴이 철렁(?)한다. 결혼식장에 축하객으로 가야 할 사람인지, 그냥 축의금만 전해야 할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야 할 사람인지 판단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말처럼 사실 은퇴 후 경조사비는 부담이 만만치 않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경조사 소식을 듣게 되면 내 경조사 때의 목록을 찾아보게 된다. 다행히(?) 명단에 없으면 ‘안도의 숨을 쉬고’ 당당하게 무시하기로 한다. 당시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아서 서운하게 생각했으면서 말이다. 참 파렴치한 일이다. 결혼식장을 찾다 보면(특히 직장 동료의 결혼식) 나이도 지긋하고 이미 자녀의 혼사를 다 끝냈으면서도 빠지지 않고 얼굴을 보이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참 존경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동등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다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해관계를 떠난 순수한 그 마음이 아름답고 또 부럽다. 한편으론 그건 그만큼 생활에 여유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다. 자로 재고 따져서 행동해야 하는 나 자신이 딱할 때가 많다.
‘예식장’이라는 이름이 일반적일 때 결혼한 우리 세대와는 다르게 요즈음의 결혼식장의 이름은 무슨무슨 ‘타워’이거나 ‘웨딩홀’이거나 (나로서는)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이름난 호텔 ‘그랜드 볼륨’에서 '예식을 거행'한다. 하객을 맞는 혼주 옆으로는 무슨무슨 대표, 회장, 사장들이 보낸 축하 화환들이 늘어서 있다. 전에 강남의 큰 호텔에서 아들 결혼식을 치른 사업가 후배는 로비에서부터 식장까지 줄지어 늘어선 축화 화환이 적어도 백 개(세어보지는 않았지만)는 넘어 보였고 축의금 접수대를 향해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줄에 끼어 간격을 줄이면서 이동하던 그 어색하던 기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몇 년 전 큰 아이 혼사를 치를 때 예식 장소와 초대할 손님들을 정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비용을 두 번 세 번 계산하면서 ‘아, 최소한의 가족 친지만 모셔 놓고’ 정말 간소한 예식을 치렀으면, 또는, 올 사람은 다 오시오, 그런데 축의금과 화환은 사절합니다‘하는 결혼식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던 기억이 난다. 둘 다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들이다. 아직 두 아이가 남은 나로서는 가슴에 돌을 매단 것처럼 무겁다. 비용 문제뿐만 아니라 그 번거로운 절차를 생각하면 그렇다.
요즘은 주례 없는 예식이 대부분이다. 우리 시대에는 주례 찾기도 보통 지난한 일이 아니었다. 주로 학교 은사에게 부탁을 하거나 명망 있는 집이라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인사에게 맡겼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 사람들 중에는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국회의원은 봄, 가을 주말이면 하루 몇 건의 주례를 서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례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경황이 없기도 했지만 그 내용 자체가 별로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주례의 약력 소개에만도 5분 넘게 걸리기도 했다. 동서양 고전의 구절들(그 중에서도 특히 논어, 맹자와 같은 동양 고전)은 왜 그리 많이 이용되었는지. 아마 그러면 뭔가 좀 유식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 은사를 주례로 모셨는데 (외람되게도) 지금 그분의 주례 말씀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재직 시에 두 번 직원의 주례 부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단호히 거절했었다. 누군가의 주례를 설만큼 덕망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또 우선 내 마음에 드는 주례사를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큰 아이 결혼식 때 신부 아버지 덕담 준비에 몇 날 며칠을 보냈었다. ‘옛말’을 인용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 특징 없이 밋밋한 덕담이 되어서도 안 되었다. 하객들을 ‘감동시킬’ 말을 찾는답시고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써가지고 간 말을 책 읽듯이 읽었다. 지금 돌아보면 낙제점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이제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덕담은 여유 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혼인은 축하하는 자리다. 무게 잡을 일도 아니고 훈계하는 자리도 아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진솔하면서도 적절하게 농담도 섞어 가면서, 먼저 경험한 사람의 소회를, 일상어로, 길지 않게, 적당히 큰 소리로 (원고 보지 말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우선 자신이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써놓고 보니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그동안 남들의 결혼식을 보면서 깨달은 것들이다.
직장 후배의 결혼식에 갔다. 역시 타워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었고 하객들의 식사와 예식이 한 장소에서 진행되는, 요즘은 꽤 흔한 방식이다. 신랑 아버지는 근사한 (개량)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보기 나쁘지 않았다. 아들 둘인데 차남은 결혼한 지가 수년이 넘었고 장남의 결혼이었다. 이즈음 흔하게 보는 풍경이다. 이왕이면 순서대로 갔으면, 하는 게 부모 바람이지만 요즘 이런 이야기 하면 물색 모르는 꼰대가 되니 입 다무는 게 좋겠다. 신랑 입장도 특이했다. 신랑 혼자 씩씩하게 입장하는 것만 봐 왔는데 아버지와 함께 입장했다.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교과서처럼 지켜오던 예식과 예법도 시대에 따라 바뀌는 건 당연하니까. 후배의 덕담도 좋았다. 결혼식에 잘 어울리는, 어렵지 않은 외국 유명 시인의 시 한 수를 곁들이며 자연스럽게 격을 갖추었고, 겸손하면서도 자상한 당부가 허황하지 않았다. 이만한 덕담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재삼 내 경우를 반성했다. 선배 후배 직원들 10여 명이 둘러앉은 식사 테이블에서 자연스럽게 아들 딸 이야기가 나왔다. 많으면 셋, 적으면 하나인 자녀들인데 대사(?)를 끝낸 사람은 반이 되지 않았다. 결혼을 중요한 통과의례의 하나로 생각한 나 같은 세대와 우리 자녀들이 처한 사정은 같지 않다. 부모라고 강요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그 욕심대로 이루어질 일도 아니다. 상이한 가치관과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혼례식을 보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가 않다. 아, 저 후배는 이제 이 복잡한 과제에서 해방되었구나! 축하할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