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효당 Sep 25. 2022

어느 결혼식장에서

노년단상 5

만혼 · 미혼 · 비혼이라는 말이 일상어처럼 들리는 시대인데 왜 이리 결혼 초대 소식은 많은가.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우리 결혼합니다’라는 알림이 하나 둘 카톡방에 뜨기 시작한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 가슴이 철렁(?)한다. 결혼식장에 축하객으로 가야 할 사람인지, 그냥 축의금만 전해야 할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야 할 사람인지 판단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말처럼 사실 은퇴 후 경조사비는 부담이 만만치 않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경조사 소식을 듣게 되면 내 경조사 때의 목록을 찾아보게 된다. 다행히(?) 명단에 없으면 ‘안도의 숨을 쉬고’ 당당하게 무시하기로 한다. 당시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아서 서운하게 생각했으면서 말이다. 참 파렴치한 일이다. 결혼식장을 찾다 보면(특히 직장 동료의 결혼식) 나이도 지긋하고 이미 자녀의 혼사를 다 끝냈으면서도 빠지지 않고 얼굴을 보이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참 존경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동등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다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해관계를 떠난 순수한 그 마음이 아름답고 또 부럽다. 한편으론 그건 그만큼 생활에 여유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다. 자로 재고 따져서 행동해야 하는 나 자신이 딱할 때가 많다.      



‘예식장’이라는 이름이 일반적일 때 결혼한 우리 세대와는 다르게 요즈음의 결혼식장의 이름은 무슨무슨 ‘타워’이거나 ‘웨딩홀’이거나 (나로서는)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이름난 호텔 ‘그랜드 볼륨’에서 '예식을 거행'한다. 하객을 맞는 혼주 옆으로는 무슨무슨 대표, 회장, 사장들이 보낸 축하 화환들이 늘어서 있다. 전에 강남의 큰 호텔에서 아들 결혼식을 치른 사업가 후배는 로비에서부터 식장까지 줄지어 늘어선 축화 화환이 적어도 백 개(세어보지는 않았지만)는 넘어 보였고 축의금 접수대를 향해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줄에 끼어 간격을 줄이면서 이동하던 그 어색하던 기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몇 년 전 큰 아이 혼사를 치를 때 예식 장소와 초대할 손님들을 정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비용을 두 번 세 번 계산하면서 ‘아, 최소한의 가족 친지만 모셔 놓고’ 정말 간소한 예식을 치렀으면, 또는, 올 사람은 다 오시오, 그런데 축의금과 화환은 사절합니다‘하는 결혼식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던 기억이 난다. 둘 다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들이다. 아직 두 아이가 남은 나로서는 가슴에 돌을 매단 것처럼 무겁다. 비용 문제뿐만 아니라 그 번거로운 절차를 생각하면 그렇다.      



요즘은 주례 없는 예식이 대부분이다. 우리 시대에는 주례 찾기도 보통 지난한 일이 아니었다. 주로 학교 은사에게 부탁을 하거나 명망 있는 집이라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인사에게 맡겼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 사람들 중에는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국회의원은 봄, 가을 주말이면 하루 몇 건의 주례를 서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례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경황이 없기도 했지만 그 내용 자체가 별로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주례의 약력 소개에만도 5분 넘게 걸리기도 했다. 동서양 고전의 구절들(그 중에서도 특히 논어, 맹자와 같은 동양 고전)은 왜 그리 많이 이용되었는지. 아마 그러면 뭔가 좀 유식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 은사를 주례로 모셨는데 (외람되게도) 지금 그분의 주례 말씀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재직 시에 두 번 직원의 주례 부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단호히 거절했었다. 누군가의 주례를 설만큼 덕망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또 우선 내 마음에 드는 주례사를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큰 아이 결혼식 때 신부 아버지 덕담 준비에 몇 날 며칠을 보냈었다. ‘옛말’을 인용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 특징 없이 밋밋한 덕담이 되어서도 안 되었다. 하객들을 ‘감동시킬’ 말을 찾는답시고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써가지고 간 말을 책 읽듯이 읽었다. 지금 돌아보면 낙제점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생각이다. 이제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덕담은 여유 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혼인은 축하하는 자리다. 무게 잡을 일도 아니고 훈계하는 자리도 아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진솔하면서도 적절하게 농담도 섞어 가면서, 먼저 경험한 사람의 소회를, 일상어로, 길지 않게, 적당히 큰 소리로 (원고 보지 말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우선 자신이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써놓고 보니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그동안 남들의 결혼식을 보면서 깨달은 것들이다.      



직장 후배의 결혼식에 갔다. 역시 타워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었고 하객들의 식사와 예식이  장소에서 진행되는, 요즘은  흔한 방식이다. 신랑 아버지는 근사한 (개량)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보기 나쁘지 않았다. 아들 둘인데 차남은 결혼한 지가 수년이 넘었고 장남의 결혼이었다. 이즈음 흔하게 보는 풍경이다. 이왕이면 순서대로 갔으면, 하는  부모 바람이지만 요즘 이런 이야기 하면 물색 모르는 꼰대가 되니  다무는  좋겠다. 신랑 입장도 특이했다. 신랑 혼자 씩씩하게 입장하는 것만  왔는데 아버지와 함께 입장했다.  또한 나쁘지 않았다. 교과서처럼 지켜오던 예식과 예법도 시대에 따라 바뀌는  당연하니까. 후배의 덕담도 좋았다. 결혼식에  어울리는, 어렵지 않은 외국 유명 시인의   수를 곁들이며 자연스럽게 격을 갖추었고, 겸손하면서도 자상한 당부가 허황하지 않았다. 이만한 덕담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재삼  경우를 반성했다. 선배 후배 직원들 10 명이 둘러앉은 식사 테이블에서 자연스럽게 아들  이야기가 나왔다. 많으면 , 적으면 하나인 자녀들인데 대사(?) 끝낸 사람은 반이 되지 않았다. 결혼을 중요한 통과의례의 하나로 생각한  같은 세대와 우리 자녀들이 처한 사정은 같지 않다. 부모라고 강요할  있는 시대도 아니고  욕심대로 이루어질 일도 아니다. 상이한 가치관과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혼례식을 보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가 않다. ,  후배는 이제  복잡 과제에서 해방되었구나!  축하할진저.

작가의 이전글 석수장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