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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Sep 12. 2022

석수장이

다시 단소를 불다

돌아보면 이것저것 취미랍시고 손 대본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소설을 써보겠다는 희망에 학교 공부는 뒷전에 두고 닥치는 대로 소설만 읽었다. 그러고는 당시 유행하던 인기 작가들의 작품 스타일을 모방한 글들을 습작이라고 끄적거리는 세월을 보냈다. 겨우겨우 들어간 대학에서도 이런 버릇은 이어졌지만 갈수록 자신의 재능 없음만 통감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연극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주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김진진, 임춘앵의 ‘국극’을 본 적은 있었지만 연극이란 걸 본 적도 없고 그 방면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게시판에 붙은 신입회원 모집 공고를 보고 ‘저거 한 번 해보면 좋겠다(물론 배우를 염두에 두고)’는 생각에 지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겐 배우나 연출에 대한 재능은 없었다. 단역보다 크게 나을 것 없는 배역을 맡아 한두 편 연기를 해보기도 했고 단막극의 연출도 맡아보았지만 결과는 별로였다. 스스로의 평가도 그랬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그랬다.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무대감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막잡이’를 하거나 스폰서를 구하고 프로그램 같은 것을 만드는, 이른바 ‘기획’이라는 일들을 주로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주로 말년과 퇴직 이후) ‘연주하고 그리는’ 취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장 먼저 도전한 것은 단소였다. 신문사 문화교실에서였다. 2년 남짓 배웠는데 다른 회원들보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영 뒤처지는 것도 아니었다. 동요나 가요 등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노래부터 시작해서 <청성곡>, <세령산> 같은 제법 고급(?)한 곡들로 발전해 갔지만 연주 실력은 별로 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눈은 높아서 이름난 연주자들만큼 연주하지 못하는 데 대한 한탄과 부러움만 커졌다. 단소반은 수강생이 많지 않아서 때로 대금반과 합동 수업을 받는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대금 연주를 듣고 나니 단소가 시들해졌다. 아무래도 대금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대금 연주 CD를 사서 듣고 악기도 기웃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단소야 몇 천 원짜리도 있었지만 대금은 싼 것이라도 해도 기십만 원이 넘었다. 그러다가 부서가 바뀌는 바람에 문화교실 시간이 맞지 않아 단소 배우는 것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퇴직이 가까웠을 무렵 근무 시간에 여유가 생기자 문인화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집에서 1시간쯤 가야 하는 문인화교실에서였다. 아내는 동네에서도 배울 수 있는 걸 왜 그리 먼 데까지 가서 배워야 하느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그래도 좋은 선생에게서 제대로 배워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 문인화도 3년 가까이 배웠지만 실력은 제자리였다. 같이 시작한 다른 사람들 중에는 사군자를 다 떼고 모란과 연꽃, 갈대도 그리고 풀벌레를 그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아직 채색도 들어가지 못한 채 줄곳 사군자에 머물러 있었다. 선생님도 딱했던지 붓글씨를 써보라며 서예 체본을 사다 주기도 했다. 그런 세월을 보내다가 해외에서 일할 기회가 생기는 바람에 문인화 배우는 것도 중단하고 말았다.



3년의 해외 근무 후 귀국해서는 동네 학원에서 클래식 기타를 배우러 다녔다. 사실 나는 통기타를 배워 리듬 위주의 연주를 하거나 실력이 좀 붙으면 멜로디 연주를 해보는 게 목표였는데 덜컥 등록을 하게 된 건 클래식 기타 학원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큰딸과 같이 시작했다가 사정이 있어 그 아이는 중도에 그만두고 혼자서 2년 반을 다녔다. 능숙하지는 못했지만 <작은 로망스> 정도를 연주할 실력은 되었다. 내가 흥미를 잃을까 봐 선생은 6∼70년대 가요곡의 멜로디 악보와 잘 알려진 영화음악 악보를 준비해주고 시범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그때쯤 완전히 일자리에서 퇴직한 탓에 수강료가 부담이 되어 (또 이제 유튜브를 통해 혼자서도 멜로디 연주는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 클래식 학원은 그만두고 동네 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기타 교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서 너 달 다녔을까 코로나19가 창궐하는 바람에 강좌는 중단되었고 그걸 계기로 기타와는 차츰 멀어져갔다. 그래도 미련이 남았던지 그 뒤로도 교재를 구입해서 한동안 집에서 ‘흘러간 노래’의 멜로디 연주를 연습하다가 지금은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클래식 기타를 그만두고 나서 시립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문화교실에서 붓글씨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이 작용해서였다. ‘허기’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게 3년 반 전이다. 그 사이 코로나19로 문을 닫은 것이 2년이라 실제로는 이제 1년 반 정도를 배운 셈이다. 그럼 그동안 배운 붓글씨는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아직까지 선생님에게서 ‘잘 쓴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고 그저 ‘열심히 하시라’는 말만 듣고 있다.       



이런 내 이력(?)을 잘 알고 있는 친구는 나를 ‘석수장이’에 빗대곤 한다. 석수장이 이야기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 나온다는데 석수장이가 자기 일에는 만족을 하지 못하고 좋아 보이는 남의 일만을 좇다가 결국에는 애초의 자기 일이었던 석수장이 일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란다.(나는 『개미』를 읽지는 않았지만 아주 어릴 적에 이런 석수장이 이야기를 어느 동화집에서 읽은 기억이 있어 이 이야기가 베르나르의 ‘창작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요즘 새삼스레 단소를 꺼내 불어 보는 나 자신에 놀라게 된다. 까맣게 잊고 있던 운지법과 기본 오음(중임무황태)을 연습하고 버벅거리긴 하지만 <낙화유수>와 <칠갑산>을 연주한다. 아! 단소 하나만을 붙들고 죽자 사자 지금까지 연주해 왔다면 지금쯤 내 연주 실력은 ‘프로’가 되었을 텐데.



요즈음 나는 가끔 부질없는 생각에 젖는다. 만약 내가 좋은 스승을 만났더라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거나 세련된 취미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매주 원고지 10장을 내주고 글 한편을 만들어 오게 하고는 그에 대한 치밀한 비평과 지도를 해주는 스승을 만났더라면, ‘눈알이 빠지게 혹독하게 지도해 주는 단소 선생을 만났더라면’, ‘손톱이 갈라져서 피가 흐르도록 연습을 강요했던 기타 선생을 만났더라면’, ‘한 주간의 숙제로 화선지 10장의 과제를 내주고 그 과제에 대한 가혹한 질책과 지도를 해주는 서예 선생을 만났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어느 인문학자의 사연을 읽은 적이 있다. 대학원 재학  지도교수가 자신의 공부와 실력에 대한 평이 얼마나 모멸적이고 혹독했던지  번이나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견뎌낸 것이 결국은 오늘날의 자신을 만든  같다고 했다. 그때 정말 많은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은가. 옛날 중국 무협 영화에 보면 처음 무술 배우러  제자에게 무술은 가르쳐주지 않고   동안이나  길러 오게 하고 장작이나 패게 하면서 수련을 시킨다거나,   동안이나 좁은  안에 갇혀 수련하는 제자가  눈을 감고 가부좌한 상태에서 '하는 파리 소리에  번의 스윙으로 잡아내는 이야기, 사서삼경  어느  경전을 지목받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고 풀어야 졸업한다는 서당 이야기, 가까이는 하루 1000번의 슈팅 연습을 시켰다는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이야기 같은  말이다. ‘스승의 역할  인간의 성장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게 해주는 일화들이다. 물론 이런 방법이 절대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있고,  재능 없는 사람이 그런 훈련만으로 성공할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단지 나는 그래도 좋은 선생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면 조금은 다른 삶을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타율에 기대보려는, 참으로 ‘무책임한 푸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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