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효당 Oct 11. 2022

다시 쓰는 일기 18 – 2022. 10. X

Happy birthday to You

아내의 생일을 기념하여 가족 모두가 연극을 보러 갔다.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공연하는 <아트>라는 연극이다. 우리 가족이 연극을 보러 다닌 경력은 오래됐다. 물론 내 영향이다. 대학 연극반에서 ‘동아리 활동’을 한 덕분에 연극은 내 평생 취미가 되었는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동연극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연극을 보러 다녔다. 몇 달 전에도 연극 <질투>를 같이 보러 갔었다. 저희들끼리 보는 연극이야 저희들 취향에 맞게 고르겠지만 가족들이 함께 보러 가는 연극은 대체로 내가 작품 선정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자꾸 옛날(?)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들을 고르게 된다. 1970∼80년대 한창 왕성하게 연극을 보러 다닐 때 활약하던 배우들이 아무래도 내겐 친숙하고 또 그 시절이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몇 달 전에 본 <질투>도 이호재 씨가 나오는 연극이었다. 한때 그의 작품들을 참 많이도 보았었다. 어쩌면 이즈음의 연극 관람은 내게는 일종의 향수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아트>는 이순재, 백일섭, 노주현, 이 세 원로배우가 출연하는 것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세 분의 나이를 합하면 242살(!)이라고 한다. 이번 작품은 원작의 15년 우정을 40년 우정으로 바꾼 ‘시니어’ 버전을 추가한 것이라는데 의외의 성공을 거둔 듯하다. 연기 경력 50년이 넘는 세 배우의 자연스럽고 노련한 연기가 티격태격하는 세 친구의 우정을 맛깔나게 표현한 것 같다.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을 할 때 관객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했다. 노익장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요즘 시니어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특히 문화 예술 분야가 그렇다. <아트>에 출현하는 세 배우 말고도 신구, 오영수, 박정자, 정동환 씨 등 7080 배우들이 ‘종횡무진’으로 활약하고 있다. 박수 쳐줄 만한 일이다. 극장을 나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어 전철역으로 가면서 아이들이 저마다 소감을 말한다. 생일날 이런 가족의 풍경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밤늦게 아이들이 사 온 케이크로 생일 축하를 했다. 요즘은 케이크도 변신 중인지 자그마한 네모 조각 6개로 구성된 것이다. 저마다 맛도 다르고 재료도 각각이다. 초도 다르다. 우리처럼 나이 많은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은(?) 초를 꽂아야 했었는데 어렵소, 달랑 숫자 2개다(!). 세상 모든 것이 진화하지 않는 것이 없다. 거실 전등을 끄고 아내가 촛불을 불어 끈다. “엄마, 소원을 생각하고 한 번에 꺼야 돼요” 작은 딸의 말이다. 아내는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지난달 25일에 세상을 떠난 소설가 김성동을 생각해본다. 그의 출세작 『만다라』를 읽은 기억을 떠올려 보고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도 그려본다. 안성기, 전무송 두 배우의 연기가 어렴풋하다. 영화 속 풍경이 참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책 『김성동 천자문』을 다시 들추어본다. 어려서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운 작가가 천지현황天地玄黃부터 언재호야焉哉乎也까지 1천 자를 친필로 쓰고 해석한 것인데 여덟 자마다 한 편씩 쓴 작가의 글(작가는 ‘군말’이라고 했다)이 또한 읽을 만하다. 글은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들을 비롯하여 한국과 중국의 역사 이야기, 인물 이야기 등으로 그 자체가 한 권의 훌륭한 산문집이다. 특히 그의 글에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우리 옛말들이 무수히 나온다.

‘끼끗하다’ ‘드레짐’ ‘비나리’ ‘해동갑’ ‘푸네기’ ‘덧드림’ 등등, 페이지마다 이런 단어 서, 너 개씩에 대한 설명이 달려 있다. 작가가 1947년생이니 불과 50여 년 사이에 우리말은 이렇게나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작가의 ‘군말중에 형광펜으로 표시해 놓은 글을 인용한다. 비교적  글인데 울림이 컸던 기억에 만용을 무릅쓰고 적어본다.






그 가을의 눈물 한 점 1

먼 골짜기에서 사족중생(네 발 달린 짐승)의 울부짖음이 귀를 찢었고,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우우- 우우- 아우성치며 달려가는 바람 소리였습니다. 천수경을 때리던 목탁을 집어던지고 문득 또 어디론가 떠나게 만들던 저 바람 소리······.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 이 중생은 다시 썼습니다. 어깻죽지가 결려 와서 도저히 돌돌붓(볼펜)을 움직일 수 없으면 벌컥벌컥 문을 열어젖히고는 하였는데, 그때마다 울컥울컥 쏟아져 들어오던 안개, 업(業) 같고 무명(無明) 같으며 그리고 또 팔만사천 번뇌 망상 같기만 하던 그 안개. 안개 사이로 저 아래 저잣거리에 꽃으로 피어오르던 불빛, 불빛들. 아흐, 사람이여. 그리고 어머니. 갈비가 부러지도록 그것들을 힘껏 끌어안고 뒹굴고 싶었습니다. 뚜렷한 본디몸(실체)으로서. 산창(山窓)을 열고 타 버린 초를 갈아 끼우고 나서 다시 돌돌붓을 잡으면 산메아리로 들려오던 산승(山僧)의 새벽 도량석(道場釋) 소리·····. 이 중생은 소리쳐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호마이카 쪽소반에 이마를 박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의 절망은 언제나 이 중생을 못 견디게 만들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도대체가 내가 어젯밤에 쓴 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당최 알아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박박 구겨서 아궁이에 쳐 넣으며 참말로 죽고 싶었습니다. 죽고 싶다는 것은 그러나 참말로 살고 싶다는 바람의 거꿀생각(역설)일진대, 무엇인가를 다시 써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밥을 든든하게 먹고 볼 일이었습니다. 그 절의 살림은 넉넉지 못하여 반찬이라고는 소태 같은 짠지 한 가지였지만 돌 틈에서 솟아나는 석간수(石間水) 하나만은 기막히게 달아서 찬물에 말아 두 사발씩 비웠는데, 미안하게도 금방 또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을 보냈을 때 이루어진 글초(원고)는 그러나 단 한 장도 없었습니다. 입술이 탔고 그렇게 달던 물맛이 소태였습니다. 병든 짐승처럼 끙끙거리며 산을 헤매던 이 중생은 참지 못하고 마침내 산을 내려갔습니다. 소낙비처럼 퍼부어 내리는 햇빛은 기막히게 좋은데 이 중생은 어깨를 접고 저잣거리를 헤매다가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금방 건져 올린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는 해수욕객들을 깊게 맺힌 마음으로 바라보며 경월소주를 마시는 이 중생의 마음은 내 깜냥에 대한 못미더움으로 찢어지는 것 같았고, 끔찍한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또 급하게 잔을 뒤집어야만 했는데, 내가 싫었습니다.     



그 가을의 눈물 한 점 2

울부짖으며 아우성치며 밀려왔다가는 소리 죽여 낮게 흐느끼며 밀려가는 물너울(파도)이며, 손뼉 소리처럼 쏟아지던 여자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아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끝없이 넘어지기만 해 온 초라한 사내를 비웃는 것 같은 밝은 햇살이며······. 쓸쓸했고 허전했고 슬펐고 외로웠으며 그리고 죽고 싶었습니다.

 절망. 절망.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돌맴이(방법)는 절망밖에 없는가. 이 중생은 옷을 입은 채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바다의 끝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 끝의 끝에 서보고 싶었습니다. 그곳에는 무엇인가 있겠지. 그러나 얼마를 가지 못하고 이 중생은 경찰관에게 붙잡혔고, 다짐글(각서)을 써 주고 산길을 오르면서 이 중생은 염불을 하였습니다. 염불처럼 서러워져 올려다본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978년 여름이었습니다. <목탁조木鐸鳥>라는 소설을 써서 만들지도 않았던 ‘중쯩’을 빼앗긴 지 세 해 만이었습니다. 강릉에서 30리쯤 떨어진 산꼭대기에 있는 보현사(普賢寺)라는 옛 절에서였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불볕의 저잣거리를 헤매던 끝에 어떻게 간신히 밥줄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수치레(행운을 누리는 일)였습니다. 한 달짜리 정해진 목숨으로 잡은 교정법사(校正法師) 자리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은단 먹은 기계병아리처럼 비실거리며 그곳을 나서는데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던 출판사 사장이 이 중생을 불렀습니다. 함께 일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일터로 나가 문을 여는데 사람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습니다.

“축하합니다.”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사장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습니다.

“축하하오.”

“무슨 말씀이신지·····?”

“당선 소감을 써 가지고 어서 한국문학사로 가보시오. 여러 번 전화가 왔었어요. 당선 작가의 화보 촬영을 해야 한다고······.”

소낙비처럼 퍼부어지는 손뼉 소리를 뒤로 하고 이 중생은 정랑淨廊(‘뒷간’의 절집말)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후들거리는 손으로 영산마지靈山摩旨(‘담배’의 절집 변말)에 불을 당기었습니다. 그리고 벽에 이마를 대었습니다. 눈물 한 점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작가의 명복을 빈다.

(표지 사진은 경주 황룡사 터로 가는 길 풍경임)


작가의 이전글 가을에 쓰는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