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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Dec 13. 2022

오래된 책들을 뒤적이며

노년단상 7

베란다 수납공간에 쌓아 놓은 오래된 책들을 꺼내 본다. 따로 서재라는 걸 갖지 못한 나는 그동안 모은 책들을 보관할 만한 공간이 없어 이 방 저 방 책장에 여러 권씩 채워 놓고 남은 것들은 베란다 수납공간에 쌓아 놓았다. 햇빛이 들지 않은 수납공간은 겨울이면 벽에 습기가 차서 물방울이 맺혀 있기도 하다. 달력 종이로 벽을 바르고 벽에서 간격을 두어 책들을 쌓아 놓긴 했지만 어쩌다 한 번씩 열어 보면 퀴퀴한 냄새에 커피색으로 변색된 책들이 ‘우리 좀 바깥으로 내 보내 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다. 이 공간에 쌓아 놓은 책들은 대부분 오래된 잡지들이거나 주로 70년대에 샀던 책들이다. 고물상(?)에 갖다 주어도 거절당할 그런 낡은 책들을 (보지도 않으면서) 왜 버리지 않고 끼고 앉았느냐고 아내는 잔소리를 하지만 내게는 그 낡은 책들이 내 한 시절의 추억의 집합체와 같아 쉽게 버리지를 못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한두 권씩 사서 보던 책들이 쌓여가면서 (나름대로 버린 것들도 적지 않은데) 결혼을 하고 작은 집에 보관할 형편이 되지 않자 (아내 눈치도 보이고) 책 사 모으는 일이 뜸해졌지만 그동안 모은 책만으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책 때문에 아내의 잔소리를 들었고 특히나 두 번의 해외 근무 때에는 그 책들을 모두 가져갈 수도 없는 형편이라 첫 번째는 살던 집 아파트 지하실에 보관했었고 두 번째는 지방에 있는 처가 지하실에 보관했었다. 처가로 옮긴 책 상자가 서른 상자는 넘었던 것 같다. 운반비만 해도 적지 않은 비용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해외근무를 마치고 다시 서울 집으로 책을 날라 오는 날은 우리 내외뿐 아니라 처형 · 처남 등 처가 식구들까지 모여서 지하실에 쌓아 놓은 책들을 정리하느라 소동(?)이 벌어졌다. 아마도 처가 식구들은 ‘공부도 그리 잘한 것 같지 않은데 무슨 책은 이리 많을꼬’하는 생각과 ‘이 낡아빠진 오래된 책들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저렇듯 애지중지하는가‘, 하고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런 눈치에 아랑곳없이 나는 번호를 매겨 놓은 상자들을 열어 보고 무슨 보물을 확인하듯 살펴보았다. 트럭에 실어온 책들을 며칠을 두고 정리를 했다. 책들이 좀 무거운가. 또 몇 해나 지하실에서 지낸 책들이라 특유의 매캐한 냄새에 겉장을 손으로 쓸면 먼지가 재처럼 묻어났지만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그리운(?) 책들을 한 권 한 권 꺼내서 먼지를 닦아내고 책꽂이에 진열하는 그 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책장에 꽂고 남은 책들은 베란다 수납공간에 채워 넣었다. 대충 계산해 봐도 400여 권은 될 듯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꼭 있어야 할 책 여러 권이 눈에 띠지 않았다. 상자들에 써 놓은 번호를 다시 확인해 보았으나 일련번호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 있어야 할 책들이 여럿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맨 마지막 번호의 상자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처가에 알아보고 운반회사에도 알아보았지만 남아 있는 물건은 없다고 했다. 찾을 길은 막막했다. 아내는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한 상자 분의 책들이 어디론가 증발된 것이 틀림없었다. 없어진 책들의 제목이 줄줄이 떠올랐다. 이어령의 『한국과 한국인』 여섯 권, 김병익 등 김 씨 평론가 네 사람의 첫 공동 평론집 『현대 한국문학의 이론』, 이제하, 최인호, 조해일, 조선작 등 70년대 작가의 첫 창작집들, 김영태의 『질기고 푸른 빵』 등 산문집 몇 권, 최인호의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 상, 하 권, 『1950년대』 등 고은 시인의 초기 산문집들, 김우창의 평론집 『궁핍한 시대의 시인』 등등 얼른 생각나는 것만도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나는 이 잃어버린 책들이 얼마나 아까웠던지 언젠가 블로그에 <잃어버린 『아메리카』>(조해일의 창작집 『아메리카』를 염두에 둔 제목)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없어진 상자에는 내 어릴 적 사진이 들어 있는 가족 사진첩 한 권과 졸업 앨범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책보고는 ‘서울시가 모아 놓은 헌책방’이다. 며칠 전 둘째 딸과 함께 서울책보고를 구경 갔다. <시대의 뒷 모습전>이라는 기획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전에 이곳을 지나친 적은 있지만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 <시대의 뒷 모습>은 ‘1960∼90년대 잡지 뒤표지에 실린 광고들을 통해 시대의 변천을 보여주는 기획’이다. 눈에 익은 광고들이 많았다. 구두 광고, 화장품 광고, 음식 광고에 기업 광고도 있었다. ‘그래 그랬지, 이런 상품들도 있었지.’ 그런 광고들 중 딸이 알고 있는 상품과 기업이 몇 안 되는 걸 보면 요 수십 년 사이의 우리 사회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서울책보고에는 희귀한 옛날 책들이 있다. 1945∼50‘s 코너에는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 월간지 『사상계』, 최현배의 『중등조선말본』등이 보이고, 1960’s 코너에는 주간지 『선데이서울』과 『주간경향』 같은 주간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비닐로 포장된 『주간경향』의 가격표를 보니 100,000원으로 되어 있다. 60년대 그 흔하게 돌아다니던 주간지 한 권 값이 10만 원이라니! 이 책 말고도 『사상계』나 『현대문학』 등 오래된 문학잡지 등의 창간호는 최소 몇만 원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   


   

내가 새삼스레 예전 책들을 꺼내본 것은 꼭 남겨두고 싶은 책들을 골라 목록이라도 적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살 날이 그리 오래지 않을 테니 이런 거라도 정리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이 낡아빠진 책들이 내게나 소중했지 아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자료적 가치나 희귀성 같은 것을 알지 못할 아이들이 남아 있는 내 책들을 옳게 보관할 리는 없을 것이다. 분리수거일에 무더기로 내다 버릴 책들 중에 이 책들만이라도 제외해 주길 원하는 마음에서 정리해본 목록들이다. 196∼70년대에 발간된 문학 · 연극 · 영화잡지 등의 창간호 10여 종, 시인 김영태의 첫 산문집과 소묘집, 6∼70년대 소설가들의 첫 창작집 초판본 대 여섯 권, 시인 정현종과 오규원의 초기 시집 초판본, 문학평론가 김현의 초기 평론집들 초판본들인데 순전히 내 기준으로 골라본 것들이다. 이밖에도 최정호 교수의 유럽 무대 예술 기행문을 모은 두 권(1974, 1976년 초판) 등 대충 세어 보니 스무 권 남짓 될 것 같았다. 내게 소중하고 애틋했던 책들이 자식들에게도 그러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세월이 지나 혹 책의 가치가 더 올라가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훗날 ‘아빠가 애착하던, 손때 묻은 물건들’로서 추억을 떠올리는 대상물이라도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금년 초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를 기억하고 있다. 30년간 책 10만 권을 모아 제천에서 헌책방을 연 김기태 교수 이야기다. 김 교수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잡지 <뿌리 깊은 나무> 76년 창간호를 만난 것을 계기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최인훈의 『광장』 초판본을 비롯하여 유명 작가 작품집 등 소설책 초판 1쇄 본 수천 권을 비롯하여 시집과 산문집 초판 1쇄본 각 수천 권, 각종 문예지와 교양잡지 초판 1쇄본 수백 권, 일간지와 일요신문 등 주간지의 창간호와 호외 수백 종, 만화잡지와 성인용 만화잡지 창간호 등 그 종류도 엄청나다. 초판 단행본이 5만 권에 각종 정기간행물이 1만5000종에 이른다는데 김 교수 자신도 정확한 자료 숫자를 모를 정도라고 한다. 30년에 10만 권이면 1년에 3000권꼴이니 매일 하루 10권씩 모은 셈인데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가 가진 헌책들 가운데 『광장』(1961) 초판본에는 200만 원의 가격표를 붙여놓긴 했지만 팔지는 않는다고 한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사료 가치를 고려한 것이다. 김 교수는 헌책방을 자신의 ‘은퇴 후 놀이터’로 생각하고 열었다고 한다. 기사 마지막의 ‘은퇴자 혹은 나이 든 이를 위한 생활 수칙’으로 여길 만한 김 교수의 말이 인상적이다.

⓵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자.

⓶쓰고 싶은 글만 쓰자.

⓷읽고 싶은 책만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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