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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Nov 28. 2022

연말 잡상年末 雜想

공산무인 수류화개

오늘 김장을 했다. 스무 포기를 했다. 작년만 해도 시집간 딸아이도 오고 원룸에서 혼자 생활하는 아들도 와서 제법 흥청거린 김장 풍경이었는데, 올해는 우리 내외와 작은딸아이만의 단출한 행사였다. 그나마 내 역할은 절인 배추를 날라주고 끝난 뒤 청소나 하는 일일 뿐 주인공은 아니었다. 아직도 집에서, 그것도 도시에 사는 사람이 김치를 담가먹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행히(?) 아내는 포기 수는 줄었을망정 여전히 이맘때면 당연히 김장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장 날 양념에 버무린 배추 간 보기와 노란 배추 속잎에 무생채와 함께 싸 먹는 돼지 수육 맛을 무엇에다 비길까? 해마다 그랬듯이 올해도 나는 큼직큼직하게 썬 무를 많이 넣으라고 간섭을 한다. 내년 봄 간이 잘 밴 아삭아삭한 무를 젓가락에 꼽아 베물어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침이 고인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김장에 관한 문헌으로는 ‘무를 장에 담그거나 소금에 절인다’는 내용이 적힌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며, 지금처럼 김치를 초겨울에 김장한 기록은 19세기 문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김장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이보다 2년 후인 2015년에는 북한의 김장문화도 등재되었다. 그러니까 김장문화는 남 · 북한 모두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문화교실에서 운영하는 금년도 2학기 서예 강좌가 다음 주로 종강을 맞는다. 이번 학기 과제로 작품 하나씩을 써서 제출해야 한다. 실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각자의 수준에 맞게 한 자든 백 자든 써서 제출만 하면 된다. 금년으로 서예 교실을 다닌 지 만 4년이 되는데 코로나19로 휴강한 시기를 빼면 실제로는 2년 남짓한 기간이다. 과제로 제출할 8글자에 대한 체본은 일찌감치 받아 놓았지만 종강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떠밀리듯 한 장을 써서 제출을 했다. 작품이라고 내놓기에 너무 부끄러웠다. 순서대로 하자면 작품 몇 장을 써서 보여드리고 그 중 나은 것을 점지 받은 후 낙관을 찍어 제출을 하게 되는데 나는 딱 한 장에 미리 낙관까지 찍어서 가져갔다. ‘제 실력으로는 이 이상은 쓸 수 없습니다’하는 고백 같은 심정으로 보면 되겠다. 선생님인들 이 대책 없는 제자를 어쩌겠는가. 마지못해 접수할 수밖에.

내가 쓴 글자는 공산무인空山無人 수류화개水流花開 8 글자다.

이 시는 중국 송나라 때 시인인 산곡山谷 황정견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누군가는 작자가 소동파라고 하기도 하여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전문은 

만리청천萬里靑天 운기우래雲起雨來 

공산무인空山無人 수류화개水流花開 16자로 되어 있다. 해석은 대체로

‘구만리 푸른 하늘에 구름 일고 비 내리네.

빈산에 사람 없어도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라고 하는 것 같다. 

나는 특히 마지막 8자가 좋아 이 구절을 써서 제출한 것이다.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산에도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는,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의 이치가 가슴에 와닿았다고 할까?    




 지난주 한국경제신문에 실린 고두현 논설위원의 ‘내 친구의 친구는 누구인가’라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글에서 인용한 문화인류학자 로빈 던바의 <발칙한 진화론>에는 ‘한 사람이 사귀면서 믿고 호감을 갖는 친구의 수는 최대 150명에 불과’한데, ‘우리가 매우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완전 절친은 대략 3 명이고, 그다음 절친은 15명, 좋은 친구는 30명, 그냥 친구는 150명’이라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게 완전 절친은 몇 명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3명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완전 절친의 기준을 무엇으로 정하는지가 문제겠지만 아무리 꼽아 봐도 도저히 세 손가락을 채울 수는 없었다. ‘지나온 내 삶이 참으로 남루하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반대로 나를 자신의 절친이라고 꼽아줄 누군가가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더욱 우울해졌다. 글의 결론처럼 ‘한 친구를 갖는 유일한 방법은 나 스스로 한 친구가 되는 것’이며 ‘친구는 나를 온전히 비추는 거울’이라는데 나는 과연 그런 친구의 삶을 살아왔는가?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순간을 기록한 ‘유성룡 달력’이 일본에서 발견돼 돌아왔다는 기사를 보았다 정식 이름은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경자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庚子’인데 서애 유성룡이 월일 · 전기를 적은 책력冊曆이라고 한다. 이 달력은 임진왜란이 끝난 2년 뒤인 1600년(경자년) 경에 사용하고 기록을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로 · 세로 20cm · 30cm 크기의 표지 포함 16장 분량이다. 이 대통력 여백에 유성룡이 날자 별로 그날 있었던 일을 빼곡하게 적어 놓았다는 메모가 인상적이다. ‘매우 더웠다. 밤에 꿈이 번거로웠다. 국화를 땄다. 모친이 변비를 앓았다’ 등. 달력에 적어 놓은 메모이니 짧은 한 두 문장인 것은 당연한데 그 건조함과 간명함이 가슴에 와닿는다. 『칼의 노래』를 쓴 김훈 작가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 수록된 「내 마음의 이순신 I, II」에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이 인용되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감정의 개입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기록한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4월 1일 : 맑음. 감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으로 갔다. 무술년(1598년) 10월 7일 : 맑음. 아침에 송한련이 군량 4되, 겉곡식 1되, 기름 5되, 꿀 5되를 바쳤다. 김태정은 볍쌀 2섬 1말을 바쳤다. 7월 3일 : 음란한 여자를 처벌했다. 각 배에서 여러 번 군량을 훔친 자를 처형했다.’ 때때로는 ‘비와 눈이 내렸다. 서북풍이 불었다. 눈이 내렸다. 흐렸다 맑았다 뒤범벅이었다.’처럼 한 줄이기도 하다. 『난중일기』의 원문은 물론 번역본도 읽은 적이 없어 전체를 알 수는 없지만 김훈 작가의 책에 인용된 것만으로도 이순신의 글은 그 어떤 수사적이고 화려한 문장보다 울림이 크다. 일기라는 제목으로 몇 편의 글을 써온 내게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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