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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Dec 29. 2022

나리타 추억

얼마 전 일본에 거주하는 지인으로부터 한 일본인 친구의 타계 소식을 듣고 한동안 마음이 우울했다. 그 친구는 내가 처음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근무할 때 같은 회사의 현지 직원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서 너 살 적었다. 많은 현지 직원 중 하나로 그리 친하게 지낸 직원은 아니었다. 술 좋아하고 스캔들이 많았던 직원으로 어쩌면 나는 그 직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던 같다. 3년 넘게 같이 지내면서도 그저 여러 명의 현지 직원 중 하나로만 대했을 뿐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정작 그 친구와 가깝게 지낸 것은 두 번째 일본 근무를 하게 되고부터였다. 정년퇴직 후 다시 한 작은 회사의 일본 주재 직원으로 채용되어 북해도에서 1년을 근무한 후 나리타로 전근 발령을 받았었다. 20여 년 만에 다시 부임한 나리타공항은 내게 많이 낯설었다. 터미널은 2개로 나누어져 있는 데다(내가 일본을 떠날 때는 나리타 제2터미널이 준공되기 직전이었다) 공항 청사 내부 구조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더구나 현지 직원이라야 2명뿐이어서 내가 해야할 업무 부담은 컸고, 단신 부임이다 보니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다. 예전 회사의 현지 직원들 가운데 아직 재직 중인 직원들이 더러 있었지만 세월이 오래 지난 탓일까 선뜻 찾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때 그 친구가 어디서 내 소식을 들었는지 부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전 회사를 정년 퇴직한 그는 한 외국항공사의 공항 업무를 대행하는 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2년 뒤 내가 귀국할 때까지 그는 내게 '둘도 없는 친구'로 늘그막에 혼자 타국에서 겪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향은 여전한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 볼수록 성실하고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친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으레 그와 상의를 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 일처럼 나서주었다.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현지 직원들을 소집하여 환영회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둘이서 선술집과 가라오케를 찾아다니며 어울려 다닌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를 통해 예전 현지직원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같이 문상을 가기도 했다.(나는 이때 딱 한번 일본의 상가 풍경을 보았다. 유리관 속에 안치한 고인의 시신을 보기도 했다.) 2년 뒤 귀국하는 날 그 친구는 내가 비행기 기내에 들어갈 때까지 같이 있어주었고 과자 선물까지 챙겨주었다. 나나 그 친구나 헤어지는 것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귀국하고 나서도 이메일과 전화로 서로 안부를 물어오다가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연락이 뜸해졌고 그마저도 끊어졌었는데 뒤늦게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이다. 평소의 과음과 또 잦은 심야 근무로 인한 과로가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친구의 타계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소식을 전해 듣고 한동안 마음이 많이 허전했다. 불과 몇 년 전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저녁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친구의 사망 소식을 들어서일까, 7년의 일본 체제 중 6년을 보낸 나리타에서의 이런저런 추억들(특히 마지막 2년)이 새삼 떠올랐다.       



새해가 다가오니 나리타공항의 신년 풍경이 생각난다. 신년 첫날 나리타공항 청사에는 종일 일본 전통악기인 샤미센 연주음악이 울리고, 청사 체크인 카운터 주변 여러 곳에 포장마차 가판대 같은 시설물이 설치되어 일반 승객들과 공항 상주직원들에게 일본 전통술을 제공하는 행사가 열린다. 그런데 술잔이 재미있다. 곡식량을 재는 용기인 (나무로 만든 사각형) 한 홉짜리 됫박(?)인데 그 용기에 항공사나 업체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일본에서 처음 이 행사를 접했을 때 여러 항공사의 술잔을 모으려고 여기저기 가판대에서 술을 받아 마시는 바람에 아침부터 술에 취해 사무실 밖으로 나서질 못했던 기억이 난다(일본의 주점에서도 이런 술잔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모은 술잔이 열 개도 넘었었는데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나리타 지역은 겨울에도 거의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이지만 수년 만에 한 번씩 큰 눈이 내려 공항 기능이 마비되는 사태가 종종 있었다. 귀국하기 전 해 1월에도 몇십 년만의 폭설이라며 밤새 많은 눈이 내렸었다. 전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이 전부 두절되어 집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이 다 막힌 상태였다. 택시를 호출해 보았지만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기약이 없었다. 당시 나는 자동차가 없던 때였으므로 걸어가지 않는 한 공항에 이를 길은 없었다. 공항 직원이 공항에 가지 못하는 사태를 만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투숙객을 수송하는 호텔 버스를 간신히 얻어 타고 12시가 다 되어서 공항에 도착했는데 청사 안은 전날 저녁부터 발이 묶여 공항에서 날밤을 새운 도착 승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한 출국 승객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공항직원들은 용케도 많이들 나와 있었다.           

나리타산(成田山) 신승사新勝寺도 생각난다. 이 사찰은 940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오래된 사찰로 신년 참배객이 300만 명이 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교통안전을 기원하는 절이라고 한다. 공항이 나리타에 지어진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철 게이세이(京成)선이 나리타에 개설된 것도 나리타산 참배객을 수송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니 그 참배객의 규모를 알 만하다.

나는 적적할 때는 자주 이곳에 가서 쉬곤 했다. 나리타산 경내는 대단히 넓어서 시내와 작은 폭포도 있고 숲과 연못 사이로는 산책로가 잘 가꿔져 있다. 여름에도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사찰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새소리만 들릴 뿐 한가롭고 평온한 곳이었다. 참배길(參道) 양쪽에 늘어선 맛집(특히 장어집들)과 기념품 가게들을 쉬엄쉬엄 구경하며 걸어가서 한나절 쉬다 오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가끔은 길흉을 알아보는 신수점도 쳐보고.(며칠 전 유튜브를 보니 전철역에서 나리타산까지의 거리 풍경을 소개하는 영상도 있었다)      


나리타공항은 도쿄 시내에서 70km 가까이 떨어진 곳이다. 공항이 속한 나리타시는 인구가 13만 명 남짓한 작고 한적한 도시다. 나리타공항과 나리타산 덕분에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만큼 그 둘을 빼면 딱히 볼 것도 없는 평범한 동네다. 처음 3년 남짓한 체류 시에는 나리타시에서도 한참 떨어진 작은 마을의 회사 사택에서 살았었고, 두 번째 체류 시에는 나리타역에서 20분쯤 걸어가야 하는 주택가의 원룸에서 살았다. JR역까지 걸어가서 전철을 타고 공항에 갔다가 저녁에 다시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단조로운 일상을 2년이나 보냈다. 나리타역에 내려 집으로 가던 길이 눈에 선하다. 장례식장과 보험회사 지점을 지나 야오코 슈퍼에 들러 반찬거리나 생필품을 사거나 세탁물을 맡기거나 찾는 일과의 반복이었다. 나는 일본 컵라면을 싫어하는데 김치와 함께 먹는 네기(파)라면만은 입맛에 맞아서 자주 사 먹었다(이 라면은 살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저녁에 퇴근하여 역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까마귀는 어찌 그리 많았던지 전깃줄에 그야말로 새까맣게 늘어서(늘어앉아) 있었고 길은 새똥으로 지저분했다. (일본에는 까마귀가 참 많다). 한 달에 한두 번 버스를 타고 이온 몰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일본식 (짭조름한) 스파게티나 회전초밥을 사 먹었다. 전에 살던 마을이 궁금해 마을버스를 타고 가보기도 했는데 동네는 거의 변한 것이 없었지만 예전 사택 건물은 헐려서 사라지고 없었다. 사택이 있던 자리를 보며 많이 허전해했었는데 이제 사택이 없어졌듯 친구도 세상을 떠나고 쓸쓸한 추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JR 나리타역 플랫폼에서 나리타공항 행 전철을 기다리던 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표지 사진은 사진작가 서동혁의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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