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효당 Jan 08. 2023

새해에는

노년단상 8

새해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야겠다. 그리고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찾아야겠다.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단체 모임들이 작년 하반기부터 조금씩 재개되더니 연말연시를 맞아서는 송년회와 신년회를 알리는 소식들이 분주하다. 나는 코로나19 이전에도 학교 동창생 모임이라든가 회사 OB모임 같은 다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에 열성적인 참석자는 아니었다. 되도록 불참할 핑곗거리를 찾았고 참석 의사를 표시한 사람들의 면면에 민감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는 이전에는 무심하게 생각되던 것들이 자꾸 마음에 거슬렸다. 이를테면 회사 OB 모임 같은 데서는 야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재직 시의 엄격한 위계가 유지된다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화제의 태반이 다녔던 회사와 연관되는 것이 그랬다. 행사로서의  성격이 농후한 의례적인 모임이라지만 그 형식성과 상투성이 싫었다. 학교 동창들 모임도 그랬다. 풋풋한 시절의 아름다운(아름답게 느끼고 싶은) 추억이 인연을 지탱해주는 바탕인 건 분명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만남의 공허함과 누추함이 모임을 끝내고 돌아가는 기분을 씁쓸하게 했다. 알맹이 없는 대화들, 너절한 화제들, 당당하고 젠체하는 군상들과 한쪽 구석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만 지키다가 사라지는 군상들의 대조적인 모습 등. 그럼에도 그런 모임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정도의 사회적인 줄다리마저 치워버렸을 때의 소외감이나 불안감 같은 것과 (아마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일 텐데) 경조사에 대한 강박감 때문이다. 아직 치러야 할 대사(?)가 남은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관계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세속적인 이유를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계산적인 태도에 허탈해하면서도 현실적인 명분을 내치지 못하며 엉거주춤한 자신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제 새해에는 과감하게 이런 형식적인 모임은 기피하고 소통이 가능한 사람들과의 작은 만남을 넓혀가야겠다. 주제넘게 눈은 높지만 사교적이지 못한 데다, 화려한 경력도 없어 지인의 범위는 한정돼 있을지라도, 만나면 즐겁고 귀갓길이 상쾌한 그런 만남들을 발굴(?)해서 소중하게 유지해야겠다. 돌아보면 내 소통 방식은 참 이기적이었다. 내가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더라도 상대방이 나를 찾지 않으면 내가 먼저 찾았던 사례는 없었던 것 같다. 그 또한 가소로운 자존심이었을까? 네가 먼저 나를 찾지 않는데 내가 너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겠다는 오만한 심보가 아니었던가. 반성하라!     



새해에는 읽고 싶은 책만 읽어야겠다. 그중에서도 ‘꼭’ 보고 싶은 책만 고르고 골라서 (때로는 그것만 반복해서) 읽어야겠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읽고 있거나 읽어야겠다고 작정한 책들이 여러 권 놓여 있다. 하나같이 두껍고 무거운 것들이다. 대부분 예전에 한번 쯤은 읽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어떤 책을 읽다가 그 안에 등장한 책 이름을 보고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책장을 뒤져 다시 꺼내 놓은 것들이다. 그런 연유로 최근에 다시 읽은 것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사마천의 『사기열전』이고.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이며, 또, 읽어야지 하고 내놓은 것이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과 레비 스토로스의 『슬픈 열대』이며 김학준의 『러시아혁명사』다. 여기까지 읽고 내가 무슨 대단한 독서가인 걸로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또 젠 체 하는 꼴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기 바란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 독서 습관이 얼마나 허세에 가득한 것인가를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불과 한 주일 전에 읽은 『백치』는 (그 분량이 엄청나긴 하지만) 줄거리조차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사기열전』도 이전에 읽었을 때 기억에 남았던 몇몇 인물들(이를테면 「백이 · 숙제 열전」이나 「자객열전」과 「소진, 장의열전」 등)을 빼고는 여전히 읽은 것에 대한 정리가 되지 않는다. 머리가 나쁜 게 가장 큰 요인이긴 하지만 그 못지않게 깊고 꼼꼼히 읽지 않는 못된 버릇이 굳어진 때문이다. 이제 와서 뒤늦게 그런 버릇을 고쳐 보겠다고 정독을 시도해보지만 머리는 산만해서 집중이 되지 않고 눈은 갈수록 침침해져서 글자는 아지랑이처럼 흔들릴 뿐이다. 딸이 사준 마사지기로 눈 마사지를 하고 수시로 인공눈물을 집어넣는 등 눈 단속을 해보지만 금세 눈은 뻑뻑해지고 눈알이 아파온다. 잠시 눈을 문지르고 허공을 보았다가 다시 책에 눈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딴생각을 하고 남은 쪽수만 가늠해보는 자신에게 한심해한다. 이런 와중에도 마을 도서관에 가서는 또 서 너 권의 책을 빌려온다. 이왕 빌려온 것이니 어떻게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비몽사몽에서도 ‘독파’는 한다. 이렇게 읽은 책이 수백 권이 된들 정작 머리에 제대로 남은 것이 몇 권이나 되겠는가! 이건 독서가 아니고 독서를 빙자한 자기기만이자 자기 최면이다. 아니 강박증이고 병이다. 이제 새해에는 읽고 싶은 책만 읽자. 한 달에 한두 권만 읽자.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 책만 붙들고 늘어지자.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안타깝지만 아예 읽지 말자. 그리고 내 수준에 맞는 쉬운 (읽고 싶은) 책만 읽자.       



새해에는 쓰고 싶은 글만 쓰자. 그러나 도무지 쓰고 싶은 글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단어 하나를 화두로 삼아서 억지로라도 쓰자.      


언젠가 어느 문인의 글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는데 쓸 수 있는 글, 쓰고 싶은 글만 써서는 좋은 문인, 생명력 있는 문인이 되기 어렵다는 취지였던 글이었다. 뛰어난 글쟁이라면 쓰고 싶은 것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많은 문인들이 쓰고 싶은 소재가 넘쳐나는 데뷔 초기에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다가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서 작품 활동이 뜸해지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을 내놓는 것도 ‘쓰고 싶은 것’이 바닥났을 때가 아니겠는가. 나 역시 쓰고 싶은 것만 쓰려고 하다가는 한 달에 한 꼭지의 글도 올리기 어려울 것 같다. 나도 쓰고 싶은 글은 있다. 예를 들어 그림 하나를 보고 짧더라도 사색적인 에세이 같은 글이 그것이다. 문광훈 교수(『예술과 나날의 마음』)나 장동훈 신부의 글(『끝낼 수 없는 대화』) 같은 것인데 물론 내겐 언강생심 꿈같은 일이다. “그림에 대해서 기술하는 것은 그림을 재현하기보다는 그림에 대한 사유를 재현하는 것이다”(마이클 박신달)라고 하는데 내가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새해에는 비록 쓰고 싶은 글을 쓸 재간은 없더라도 단어 하나, 에피소드 하나를 가지고서도 이야기 한 꼭지를 ‘만들어보는’ 그런 노력 정도는 해보자.        



지난 글에서 소개한 김기태 교수의 ‘은퇴자 혹은 나이 든 이를 위한 생활 수칙’ 세 가지를 빌어서 새해 각오를 써보았다. 다만 김 교수의 말씀을 약간은 비틀어서 내 식으로 고쳐 보았다. 짐작컨대 그분이 말한 것은 교수로서의 그분 나름의 사정에서 온 것일 것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자’는 비즈니스 관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만남을  지양하자는 의미일 것이고, ‘읽고 싶은 것만을 읽자’는 것은 직업 상 의무감으로 읽는 것을 지양한 자발적인 독서로, 또한 ‘쓰고 싶은 것만 쓰자’는 것도 내키지 않으면서도 써야 하는 글은 쓰지 말아야겠다는 각오에서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한마디로 의무감에 얽매이는 짓은 하지 말자는 취지였을 텐데 나는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 다짐해보는 각오라고 해야겠다.


<표지 그림은 인사동에서 전시 중인 장주원의 작품임>


작가의 이전글 나리타 추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