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효당 Jan 20. 2023

일기日記를 쓴다는 것

2000년부터 2018년 말까지 일기를 썼었다. 사나흘에 한 번, 때로는 일주일에 한 번 꼴이었다. 가족 친지의 통과의례나 기념행사, 아니면 누구와 만났거나 어디를 갔거나 하는 내용이고 드물게는 책 이야기였다. 대체로 사건 위주의 내용이었다. 가끔은 어떤 사건에 대한 의견이나 생각, 지난 추억 같은 것들이 섞여 있기도 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근해서 주로 아침 시간에 컴퓨터로 썼다. 사정에 따라 이삼일 치를 하루에 쓰기도 했다. 2018년 봄에 회사를 퇴직하자 이런 습관은 허물어졌다. 집에서 나 홀로 오붓하게 글 쓸 공간이 없었기에 한동안은 일주일에 2∼3일씩 다니던 도서관 열람실에서 일기를 썼다. 노트에 썼다. 어느 작가처럼 ‘연필로 꾹꾹 눌러’ 쓰지는 않았다. 볼펜으로 썼다. 그런데 웬일인가! 도무지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어느새 컴퓨터 글쓰기에 익숙해진 인간이 되어 있었다. 컴퓨터로 쓸 때만큼 머리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문장은 물론 글씨도 엉망이었다. 몇 줄 써놓고 읽어보니 도무지 글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몇 문장을 적는 것으로 계속하다가 차츰 날자 간격이 벌어져서 급기야는 한꺼번에 여러 날 분을 몰아서 쓰게 되었는데 날자와 행사 내용만 간단히 한 두 줄 적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저도 흐지부지되다가 결국에는 그만두고 말았다. 지금 브런치에 <다시 쓰는 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그걸 일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딱히 한 주제로 풀어낼 수 없는 시시콜콜한 일상적인 일들을 한데 묶어 놓은 그럴듯한 제목일 뿐 바른 의미의 일기하고는 거리가 먼 글이라고 해야겠다.      



가끔 USB에 저장된 예전 일기들을 다시 읽어 보는 때가 있다. 몇 개에 나누어 저장했던 USB 중 하나는 분실해서 10년 치 정도의 일기가 남아 있는데 다시 읽어 보니 이게 과연 일긴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 그때 이런 일이 있었지 하고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기는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건조하고 밋밋하며 단조로웠다. 초등학생의 방학 일기보다 나을 게 없는 것 같았다. 대체로 사건 위주인 데다 형식적이었다. 꼭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따른 글로 보였다. 간혹 스스로를 질책하고 반성하는 대목이 있었지만 감상적이었고 치열함이 없었다. 신세타령이나 자기변명도 많았다. 무엇보다 많은 것을 감추고 있었다. 부끄러운 일은 쓰지 않았다. 그건 누군가에게 이 일기가 노출될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인 우려에서였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로 이걸 일기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엘리아스 카네티의 에세이집 『말의 양심』을 다시 읽으면서 비로소 내가 쓴 것은 ‘진정한’ 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네티는 기록, 비망록, 그리고  일기를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기록이란 ‘순간적으로 생각난 것을 쓴 것으로,  대부분 짧고 때로는 번개처럼 신속하고 검증되지 않고 허영심이 없고 제어되어 있지 않으며, 어떠한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 그 당시 자신이 기록했던 일들이 마치 딴 사람에 의해 써진 것처럼 느껴지고,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라도 이 기록의 몇몇 일들이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비망록은 ’자신의 달력‘이다. 우리에게는 좋은 날들이 있는가 하면 나쁜 날들도 있고 자유로운 날들이 있는가 하면 괴로운 날들도 있는데, 그가 몇 마디 말들과 문자로 이러한 날들을 기록해 놓기만 해도 그 달력은 그 자신의 것이 된다. 가장 충실한 사건들이 기념일을 만들게 되고 그리하여 그 자신의 역사를 갖게 된다. 비망록은 관심을 끌거나 만족시켜 준 것들을 주로 명사로 된 서너 마디의 단어로 언급한다. 이를테면 만남, 이별, 죽음 등과 관련된 몇 사람의 이름, 순간적인 착상, 동경하다 방문한 장소 등. 그러니까 국외자들은 그걸 봐도 이해할 수가 없다. 비망록은 ’세월이 지나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이 새로운 것인 양 그 비망록을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중요하다. 비망록이 그 이상이 되면(카네티의 표현으로는 ‘사물 그 자체와 논쟁을 벌이게 되면’) 메모 형식의 테두리를 벗어나 ‘일기’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이런 비망록이 일기의 맹아萌芽인데 일기와 비망록은 서로 혼합되어 있지만 카네티는 그 둘을 엄격하게 분리한다.



일기에 대한 카네티의 생각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일기란 공적인 일기(이를테면 『승정원일기』 같은)나 여행기 등 뚜렷한 목적으로 쓴 일기가 아닌 개인의 내밀한 일기가 그 대상이겠다. 또 작가로서의 카네티가 말하는 일기를 우리 같은 일반인의 일기와 같이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그의 글을 통해서 일기라는 것이 가지는 특성과 일기 쓰는 자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겠다.  

일기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이야기한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나 청중(미래의 청중이든 죽은 뒤에  있는 미지의 청중이든)을 의식하는 자는 진실을 위조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자기)는 우리를 속속들이 이해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게 어떤 것을 꾸미거나 의례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그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우리가 위조를 하면 즉시 그 사항을 가혹하게 추궁한다. 자기가 자신을 조금도 용서해서는 안 되며 또 마치 자신을 마치 다른 사람인 양 엄격하고 가차 없이 다루어야 한다. 그래서 카네티는 그 글의 제목을 <무자비한 상대와의 대화>라고 했다.

일기는 대화적이다. 대화적 성격을 지니지 못한 일기는 무가치한 것이라서 자기 대화 이외의 형식으로는 일기를 쓸 수 없다. 그래서 삶의 어떤 내용은 일기 형식을 통해 가장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을 한다. 실제 생활에서는 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가차 없는 태도의 말들이 이곳에서는 마지막까지 이야기된다. 물론 이러한 대화들은 비밀로 남는다. 그래서 일기란 은밀한 것이다. 은밀하지 않은 일기란 일기가 아니다.

우리는 또한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일기를 써야 한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있게 마련인데 만약 그러한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으면 그러한 일들은 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카네티는 일기를 쓰는 일은 자기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폭발해 버리거나 산산조각이 나버릴지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 그것이 자신이 일기를 쓰는 주요한 이유라고 했다. 쓰인 문장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카네티의 글을 읽고 나니 과거에 내가 써온 일기는 카네티 식의 분류에 따르면 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비망록과 일기가 뒤섞인 것이었다. 오히려 비망록의 성격이 컸다. 굳이 말하자면 비망록으로서는 내용이 길고 주관적이었고 일기라기엔 짧게 언급해야 할 기념적인 것들을 쓸데없이 길게 늘어놓은 것이었다. 카네티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비망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어차피 그가 말하는 식의 일기를 쓰기에는 (지금으로서는) 힘에 부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비망록을 열심히 써야겠다. 나 같이 무심하고(매해 아이들의 생일이나 친척, 특히 처가 제삿날을 기억 못해 핀잔을 받는다) 건망증이 심한 사람에게는 이 비망록이 참 중요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언급한 서애 유성룡의 비망기입대통력備忘記入大統曆 같은 것이 바로 비망록이었다. 비망록이 일기의 맹아라고 했으니 비망록을 열심히 쓰다 보면 언젠가 이 비망록을 토대로 제대로 된 일기를 쓸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래도 브런치에 <다시 쓰는 일기>(또 언젠가는 비슷한 다른 이름으로 바꿔서 쓸지도 모르겠다)라는 이름으로는 계속 써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새해에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