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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Feb 06. 2023

다시 쓰는 일기 21 – 2023. 2. X

입춘방立春榜을 붙이며

지난 토요일이 입춘이었다. 예전부터 입춘에는 대문에 입춘방榜을 써 붙이는 게 풍속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올해 입춘이 들어오는 시기는 2월 4일 오전 11시 43분이라고 했다(참 좋은 세상이다). 요즘이야 이렇게 몇 시 몇 분까지 정확하게 절기가 들어오는 시간을 계산할 수 있는 모양인데 예전에는 그저 사시巳時, 오시午時 등으로 넓게 잡았을 것이다. 입춘날 써 붙인 입춘방은 우수 전날 떼도 되고 다음 해 입춘까지 1년 내내 붙여 놓아도 된다고 한다. 명색이 한문 서예를 배우러 다니고 있으니 작년과 재작년에는 내가 직접 입춘방을 써서 붙였다. 그런데 올해는 어느 사찰에서 나누어주는 입춘방을 받아서 붙이게 되었다. 지난주에 개강한 한문 서예반에서는 입춘방을 쓰는 회원들이 몇 명 있었다. 자연히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왜 들 입入 자가 아니고 설 립立 자냐 하는 이야기부터, 붙이는 시간과 장소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들 중에 나는 ‘깜짝 놀랄 사실’을 알았다. 매년 나는 입춘방을 현관문 안 양쪽 벽에 붙였었다. 그러니까 집안에서 바깥을 향해 붙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 분이 ‘아니 방榜을 집 안을 향해 붙여야지 바깥을 향해 붙이면 어떻게 하느냐’며 어처구니없어하였다. 바깥의 따뜻한 봄기운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한 해를 풍성하게 해 달라는 마음을 담은 것인데 ‘댁은 오히려 바깥으로 내보낸 셈이네요’하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지당한 말이 아닌가! 그러니 지금까지 나는 아무 소용없는 입춘방을 써 붙였던 것이다. 이 무지함이여!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대부분 아파트 현관문 안쪽의 거실로 들어가는 문 위에 붙이는 모양인데 우리 집은 옛날 집 구조로 현관문을 열면 바로 거실이라 실내를 향해 붙일 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올해는 (당당하게) 아파트 바깥 현관문 중앙에 입춘대길 한 장을 붙였다. 한옥에서처럼. 한옥은 바깥 대문에 붙여 놓아서 오가는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지 않은가. 아, 지금까지 이렇게 방을 잘못 붙였으니 다경多慶한 일이 없었구나! 이제 제대로 붙였으니 올해는 대길大吉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지난주 KBS의 <한국인의 밥상>에는 어떤 ‘효자’ 분의 이야기가 나왔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분이었는데 11년 간 집에서 치매 어머니를 봉양한 분이었다. 처음 치매 증세를 보였을 때는 그저 1년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간병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11년까지나 되었다. 그 긴 기간 동안 그분이 어머니에게 만들어 드린 음식 종류가 수십 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치아가 부실한 어머니가 좋아하면서도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죽처럼 묽게 갈거나 잘게 부수어 먹기 좋게 만들어 드리느라 연구를 거듭해서 장만한 것들이었다. TV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과 더불어 자책감이랄까 숙연함이랄까 하는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마침 이 방송을 올해로 백수白壽(세는 나이로)를 맞는 어머니와 함께 보았다. 방송에 나오는 ‘미담’을 보는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는 귀가 어둡고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거나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하고, 거동이 온전치 않아 집안에서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는 하지만 치매를 앓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몸 건사에 관해서는 혼자서 해결할 만큼 건강하다. 이런 어머니지만 나는 때로 노모를 봉양해야 하는 상황을 불편해하고 짜증을 내고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효성이 지극한 자식의 사례를 TV 같은 데서 볼 때면 나로서는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저렇게 특별하고 아름다운 모자간의 지극한 인연은 어디서 오는 건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음식을 평하면서 ‘예전에 어머니가 해준 음식 맛’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가 해준 음식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별로 없다. 어머니는 손이 ‘맵짜고’ 음식 솜씨가 좋은 분이어서 음식 맛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건 풍족한 생활이 아니었기에 먹은 음식의 종류가 단조로웠던 탓일 수도 있겠고, 일찍 홀로 되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늘 귀가가 늦었던 어머니여서 철 들 나이가 될 때까지 동생과 둘이서 (거의 동일한 반찬으로) 식사하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이런 내 말에 어머니가 서운해하실지 모르겠다. 내가 건망증이 심한 탓에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생각나는 음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같은 건 아니고 잘 말린 양미리(호미처럼 생겼다고 경상도 사투리로 ‘호메이고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에 된장과 고추장을 발라 석쇠에 바짝 구운 것이다. 자주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은 아니었다. 

요양원에서 지내는 노인이 대세인 시대에 나 역시 노년에 이른 사람으로서 <한국인의 밥상>을 보고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새해에는 꼭 보고 싶은 책만 골라서 집중, 반복해서 보자고(보르헤스는 ‘자신은 한번 보고 말 책은 아예 보지 않는다’고 했다) 다짐해 놓고도 연초부터 도서관에 가서 책을 5권!이나 빌려 왔다. 그중 하나가 조르조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이다. 아감벤의 책은 이전에도 몇 권 빌려왔었는데 대부분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 책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편이었는데도 중반 이후부터는 다 읽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20세기 윤리(학)는 니체의 원한의 초극에서 시작된다. 과거에 대한 의지의 무능에 맞서, 일단 일어나 버려 돌이킬 수 없는, 그래서 더 이상 의지될 수 없는 것에 대한 복수의 정신에 맞서 차라투스트라는 과거를 의지意志하라고, 모든 것이 반복되기를 욕망하라고 가르친다. 유대-그리스도교 도덕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과거를 온전히 감당하는 능력의 이름으로 20세기에 완성되며······.’

‘······부끄러움이 사실상 모든 주체성과 의식의 숨은 구조와 같은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것인지 이제 명확해지는 듯하다. 의식의 언표화라는 사건 안에서만 존재하는 한 본질적으로 의식은 떠맡을 수 없는 어떤 것에 맡겨짐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의식한다는 것은 무의식에 소환됨을 의미한다······.‘

잡히는 대로 펼쳐서 인용해 본 대목이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책에서 다루는 내용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고 개념을 모르거나, 저자의 사유를 따라가지 못하고, 문장에 나타나는 상징과 비유를 이해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는 책만을 읽는 것도 안 읽은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독서에 길들여지면 어려운 책은 영영 읽지 못할 것 같다. 독서는 등산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낮은 산은 쉽게 오를 수 있지만 2000m, 3000m의 산은 오르기 힘들다. 체력 훈련도 해야 하고 적절한 장비도 갖추어야 한다. 금방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른 산에서 경험하는 조망은 크고 장엄한 감동을 준다. 새해는 적더라도 깊게 읽는 훈련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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