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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Feb 19. 2023

<시간을 잘 쓰는 사람들>을 읽고

노년단상 10

은퇴한 지 5년째다. 하루하루 무료하고 지루한 시간일 때가 많다. ‘시간은 남아돌고 일은 없으니’ 그렇다. 해가 갈수록 그런 느낌은 더 커지는 것 같다. 나이 들었다고 다 나처럼 지내는 건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일이 있는 사람’은 고단함을 느낄지는 모르겠으나 무료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예술가와 학자, 사업가(자영업자)와 (평생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 농어촌의 노년층 같은 ‘정년이 없는’ 분들은 일상이 지루하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요즈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예술인들 이름을 나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매월 초대 손님과 함께하는 토크쇼 형태의 (내가 즐겨 보는) 유튜브 방송을 운영하는 일본 가수 가토 도키코 같은 사람은 80 나이이지만 한 해 여러 차례 콘서트를 열고 거의 매년 책을 써낸다. 이런 분들이 일상이 지루하다고 느낄 리가 없다. 물론 자신의 의지로 은퇴를 정할 수 있는 분들 중에서도 ‘일이 없어’ 무료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일 없이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지내는 퇴직자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퇴직자들 중에도 여전히 바쁘게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 백두대간 종주를 비롯해 거의 전문적으로 산을 다니는 친구와,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와 책을 내고 지금도 어디 해외를 순방 중인 지인도 있다. 고향으로 귀촌해 텃밭을 가꾸며 사는 친구에, 조경, 원예기능사 국가 자격증과 (이전에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농작물 손해평가사 자격을 따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온 후배도 있다. 하얀 수염을 기르고 패션 안경을 끼고 다니는 동갑내기 친구는 수시로 자작시 한 편을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보내고 매년 국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완주하고는 그 사진을 올린다. 최근에는 지방에 거주하는 ‘이색적이고 특별한’ 일을 하는 학교 동문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사진을 찍어서는 밴드에 올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친구가 일상의 무료함 같은 것을 느낄 리가 없다.   


    

내 주변사람들의 사례를 기준으로 대부분의 퇴직자들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정리해 보면 이럴 것 같다. 우선 ‘몸이 바쁜’ 사람들이다. 운동을 하는 시간이 많다. 등산이나 조깅, 헬스를 하거나 수영, 자전거 타기,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매일 만 보, 만 오천 보 집 근처 공원을 걷거나 동네 야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더 많다. 장수 시대에 걸맞게 몸이 건강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여기저기 모임에 얼굴을 내미느라 바쁜 사람들도 꽤 있다. 학교 동문회와 회사 OB 모임은 말할 것 없고 당구다 탁구다 온갖 명목의 소모임들을 만들어 순례하느라 쉴 틈이 없다. 한편으로 신체 단련보다는 정신 단련(?)에 주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붓글씨나 그림, 악기를 배우러 다니는 취미 생활이 그렇다. 일주일 내내 도서관에 출근하는 사람들(물론 그중에는 마땅히 시간 보낼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도 있고 지자체를 비롯해서 여기저기서 행해지는 인문학 강좌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 중에 어쩌다 한두 번 외출하는 일을 빼고는 집에서 TV나 컴퓨터, 핸드폰 조작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다. 안사람들의 ‘속을 뒤집는’ 유형이다. 내가 여론 조사를 해 본 것도 아니니 정확하지는 않을 테지만 대체로 이런 유형으로 나누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럼 나는 어떤가? 운동이라고는 일 주 일에 한두 번 동네 공원이나 야산을 산책하는 것이 고작인데 이것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서 마지못해 하는 일이다. 규칙적인 것은 아니지만 운동으로 포함시킨다면 외출하는 날 걷는 일이 해당될 것 같다. 붓글씨를 쓰러 가거나 박물관이나 전시회를 보러 갈 때,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날은 전철을 타는 구간을 빼곤 내처 걷는다. 그게 대개 만몇 천 보는 된다. 그래 봐야 일주일에 이, 삼일에 불과하니 운동량은 아주 적다고 해야겠다(건강검진 때마다 ‘운동 부족’ 경고를 받는다). 나머지는 집에 있는 날이다. 집에서 하는 일이라야 한두 시간 책을 읽고, 일주일에 서너 번 기타 연습을 하거나 붓글씨를 연습하는 것이다. 가끔 오늘처럼 생각나는 쓸거리가 생기면 컴퓨터 앞에 앉아 한두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나머지는 침대에 누워 하릴없는 공상이나 하면서 지나간 날들을 되짚어보거나 집안을 서성거리는 정해진 패턴이다. 밤에 잠도 잘 안 오니 무료한 시간은 더 길어진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이 중앙일보에 쓴 <시간을 잘 쓰는 사람들>이라는 칼럼을 읽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 내기가 어려운 바쁜 사람들’이면서도 시간을 쓰는 방식이 ‘심미적’인 사람들, 즉 시간을 ‘예술적으로 쓰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대면보다는 e메일을 통한 대화가 일반적이고 ‘시간을 돈으로 세는’ 이 시대에 돈보다는 시간을 쓰는 데서 좋은 태도를 보여주는 몇몇 사람들을 예로 들고 있다. e메일로 원고를 청탁했음에도 차마 메일로 거절하지 못해 전화를 걸어와 30분 동안이나 거절 사유를 해명하는 작가, 후배 편집자와 작가를 위해 원고를 독파하고, 자료 출력과 정리, 보조 자료 작성 등을 직접 찾아와서 ‘얼굴을 맞대고 해 주는’ 출판교정가, 일부러 도서전 부스로 찾아와 응원의 말을 전하고,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어 (아마도 그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에 대한) 독후감을 말해주는 유명 작가 등이 그런 분들이다. 반면에 비서나 조교를 통해서 추천서 건 당 얼마라는 지불 액수나 겨우 전해 들을 수 있는 저명인사의 경우를 대조적인 사례로 들면서 유은혜 씨는 이런 식으로 ‘상대를 대하는 데 1분도 허락하지 않는 신체는 차갑게 느껴지고 그 시간은 컨베이어벨트 위의 시간과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고 했다. 아마 이는 단순히 바쁜 사람의 시간 쓰는 방식 이전에 사람의 품격과 향기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으면서 현역에 있을 때의 나는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아가 오히려 퇴직자로서 시간의 바다에 빠져 지내는 요즘의 나는 과연 얼마나 타인을 위한 시간을 써 왔는지를 반성해 보았다. 바쁨 속에서도 타인을 위한  시간 씀이 분명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따분하고 지루하게 여기는, 남아도는 시간들을 가족을, 그리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쓰는 것 또한 ‘잘 쓰는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면 그런 일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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