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효당 Mar 04. 2023

‘남 몰래 흘린 눈물'

거실에서 혼자 KBS의 「한국인의 밥상」을 보고 방(막내아들이 직장 근처 원룸으로 독립한 뒤 내가 잠자고 책도 보는 공간)에 들어와 있는데 아내가 할 말이 있는지 들어와서는 얼굴색이 왜 그러냐고 묻는다. 눈가가 붉어져 있는 내 모습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대충 얼버무리려다가 ‘TV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번 주 「한국인의 밥상」에 나온 96세 ‘화가 할머니’와, 외딴섬의 등대지기였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며 눈물이 났었다. 아흔여섯의 할머니가 그린 그림들은 어쩌면 그리도 색채가 화려한지 감탄할 만했고 아이들과 꽃 등의 그림 소재는 동화적이고 그 느낌은 따스했다. 아마 할머니의 그리움과 어릴 적 꿈같은 것들을 표현했을 것이다. 화가 할머니 그림을 보고 눈가가 붉어지던 차에, 등대가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등대지기였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그 딸과 손자가 부르는 동요 「등대지기」를 듣자 마침내 눈앞이 흐려지며 축축해졌다. 아내에게 이 이야길 하니 그 할머니 화가는 KBS의 「인간극장」을 비롯하여 여러 매체에서 방송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잘 ‘울질 못하고’ 혼자서 울었던 적은 꽤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리 철이 없던 아이라고는 하지만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서 주변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었다. 6 살 어린 남동생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걸 알고 있는 친척들이 ‘제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귀여워했는데 애가 어찌 저리 매정하냐’고 수군거렸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었다. 그 뒤로도 가까운 분의 장례식 같은 행사에서도 울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스스로도 눈물이 나지 않는 자신을 참 민망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남들 앞에서는 울지 못하는 내가 혼자서 우는 경우는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TV에 소개되는 어떤 사연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그랬다. 중학생 때 학교 수업을 빼먹고 영화관을 전전하던 시절, 지금 보면 스토리가 유치하고 내용이 뻔한 한국영화들을 보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고, 동일본 대지진 후 일본 TV에 소개되던 그 처참하고 처절한 희생자들의 사연을 보면서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울었다. 또 어떤 노래들, 예를 들면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든지(가사 중에서도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오리다’ 같은 대목에서 그랬다) 일본 가수 가토 도키코의 「내 인생에 후회 없다」나 「레몬」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런 때는 대체로 빈 방에 혼자였을 때였다. 아마 여러 사람이 같이 있던 상황이었으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참았을 것이다. 남들이 있는 데에서 정말 서럽게 울었던 때가 꼭 한 번 있었다. 벌써 4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정신박약이었던 가까운 친척 동생을 보호소에 넣으러 데리고 가는 그 집 식구들과 동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내 평생에 그렇게 울어본 적은 없다. 보호소에서도 그랬고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도 정말 하염없이 울었었다. 그 아이(아이라기엔 이미 그때 스물이 넘은 나이였다)는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간혹 이상한 몸짓을 반복할 뿐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한 인간에 대한 가련함으로 가슴이 미어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간이 가면서 차츰 잊힌 그 모진 이별이 다시 생각나 이 글을 쓰는 내 눈이 다시 흐릿해진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이규태 선생(2006년 작고)의 칼럼 중에 「눈물의 한국학」이라는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선생은 서소문 밖에 있던 속칭 ‘눈물다리’[누교淚橋]를 설명하면서 눈물의 종류를 여러 개로 나눈다. “‘누淚’는 마냥 흘러내리는 눈물이요, ‘누泪’는 눈 가장자리에 괴어만 두고 흘려서는 안 되는 눈물이다. 같은 눈물이라도 일직선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체涕’라 했고, 갈라져 흐르되 얼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눈물을 ‘사泗’라 했으며, 펑펑 흘러내린 눈물일 때 ‘누淚’라 했다. 콧물과 더불어 흘리는 눈물은 ‘이洟’이고·····”.

선생이 소개한 ‘눈물다리’는 이러하다. “서울 서소문 밖에 돌다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다리 이름이 ‘눈물다리’로 속칭되었다. 그 다리를 건너면 숱한 천주교신자들이 참형을 당했던 서소문 밖 형장에 이른다. 형이 집행되는 동안은 가족이건 친지건 이 다리 이상은 접근하지 못하게 돼 있었다. 또 형이 집행되는 동안 울음소리나 통곡 소리를 내면 그 영혼이 원령怨靈이 된다는 속신俗信이 있어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벅차게 솟아나오는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했기 때문인지 눈물다리를 누교淚橋라 하지 않교 누교泪橋로 표기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친척 동생과 이별하면서 흘린 눈물은 淚였던 것 같고, TV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흘린 눈물은 泪였던 것 같다. 참고로 이규태 선생에 대해서 몇 마디 보태야 할 것 같다. 선생은 생전에 『한국인의 의식구조』 등 120여 권의 저서를 냈고, 1983년부터 2006년 작고할 때까지 조선일보에 이규태 코너라는 이름으로 칼럼을 6702회 연재했다고 한다. 특히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신문 전면의 반에 해당하는 지면에 60회로 연재된 <개화백경>이라는 기사였는데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거기 실린 사진들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중고서적 사이트에 이 연재물 스크랩한 것이 100,000원에 나와 있다)     



이제는 그런 풍속이 사라지고 없지만 예전에는 초상이 나면 곡哭을 했다. 곡은  눈물은 없이 소리만 냈다. 곡이란 일종의 ‘리추얼'이었다. 그런데 곡을 하다 보면 어느새 그 곡이 스스로를,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의 슬픔을 불러와서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것은 망자에 대한 애도이자 스스로를 정화하는 의식이었던 것 같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이미 리추얼이 종말을 고한 시대에 살고 있다. 살다 보면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내 맘 같이 되지 않을 때, 그리고 왠지 억울하고 원통해서, 지나 온 시절의 어느 대목이 못 견디게 사무치고 복받칠 때 크게 고함이라도 치며 엉엉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예전에는 그런 리추얼이 자신의 원통함과 서러움을 정화시킬 기회가 되기도 했는데 이제 우리에게는 그런 의식儀式도 없는 것 같다. 그저 TV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남몰래 흘리는 눈물’로 살 수밖에.     




작가의 이전글 <시간을 잘 쓰는 사람들>을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