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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Mar 16. 2023

다시 쓰는 일기 22 – 2023. 3. XX

봄이 오는 길목에서

아직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낮 기온은 10도를 넘어 두꺼운 외투가 무겁다. 나무들 모습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하긴 우수, 경칩도 지나고 이제 곧 춘분이니 자연의 순리를 어찌 거스르랴. 그런데 나는 봄이 다가오면 조바심이 난다. 오래전 위장 질환으로 수술받은 자리(수술 후 봉합한 부위)가 봄만 되면 말썽이 나서 병원을 들락거려야 하기 때문이다. 외과에도 가고 피부과에도 다닌다. 대개는 항생제와 진통제 처방이 고작인데 한 달 여를 이렇게 치료받고 나면 통증은 완화되지만 그 대신 약 복용에 따른 위장 장애로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고생한다. 몇 년째 이런 일이 되풀이되다 보니 뭔가 다른 방안이 없을까 생각하다 보름쯤 전, 동네의 한 한의원을 찾아갔다. 언젠가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봄이 되면 면역력이 떨어져서 생기는 현상일 수 있으니 병원을 찾기 전에 ‘보약이나 영양제 같은 것을 복용해서 면역력을 높이라’는 조언이 생각나서였다. 우리 동네에 한의원이 여럿 있지만 특별히 이 한의원은 개원하기 전에 미리 가서 대기를 해야 할 정도로 늘 붐볐다. 일전에 어머니의 허리 병으로 침 맞으러 모시고 간 적이 있었는데 의사가 온화하고 친절한 분이어서 인상에 남았었다. 1시간 남짓을 기다린 후 진료실에 들어가 증세를 대충 설명하니 의사가 맥을 짚어보고는 ‘신경성’ 요인이 크다고 했다. 내 피부는 특이한 체질이라 외과적인 특별한 처방은 없고 신체적 측면보다 ‘속을 다스리는’ 처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루 이틀에 나을 증세는 아니고 시간을 가지고 꾸준히 치료해야 할 질환이라고 했다. 우선 열흘 분의 약을 처방해 줄 테니 먹어보고 경과에 따라 추가 처방을 해보자고 했다. 의사의 ‘신경성 요인’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살이 헐고 덧나서 생기는 병인데 신경성이라니? 하면서도 차츰 납득이 갔다. 그러니까 ‘마음에서 오는 병’, 성정性情에서 오는 병이라는 말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제대로 찾았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다. 집에 돌아와 한동안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누구는 국제마라톤 참가다, 국토 종단 자전거 여행이다, 다낭 여행 중이다, 하고 카톡 문자를 보내오는데 나는 약봉지를 옆에 놓고 이런 글이나 쓰고 있으니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봄은 화창한 계절이고 희망의 계절이다. 당연히 봄을 주제로 한 시와 소설도 많고 음악도 있고 그림도 많다. ‘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이 자라나는’ 4월을 노래한 엘리엇의 <황무지>,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한 김영랑의 시, 김유정의 소설 <봄봄>, 보티첼리의 그림 <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쇼팽과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왈츠>, 가곡 <봄처녀>,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련해지는 김동환의 시에 김규환이 곡을 붙인 <산 너머 남촌에는>, 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 최인훈의 희곡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열거하자면 아마 몇 쪽은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 속담도 많다. ‘봄 백양白楊 가을 내장內藏’ ‘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 ‘봄꽃도 한때’, ‘겨울 추위에는 살이 시리지만 봄추위에는 뼈가 시리다‘, ’가을볕에는 딸을 쪼이고 봄볕에는 며느리를 쪼인다‘ 등등.  봄이 ’보다‘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봄은 우리 고유어로 15세기부터 현재까지 형태 변화 없이 쓰이고 있다고 한다. 보리는 봄의 상징으로, “보리알이 여물 때”에서 ‘보’와 물의 ‘ㅁ’이 봄의 어원이라는 설이 있는 것 같다(국립국어원 홈페이지). 어느 책에 보니 14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에서는 한 해를 여름, 겨울 두 철로 나누었다. 봄(Spring)이란 말은 16세기부터, 가을(Autumn)이란 말은 14세기 시인인 초서가 처음 썼다고 한다.



봄을 생각할 때 내게 떠오르는 글이 둘 있다. 하나는, 매년 한 두 번은 되풀이해서 읽는 김윤배 시인의 책 『시인들의 풍경』 중에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난 신경림 시인’이라는 글에 나오는 대목인데 인용해 본다.     

'······아지랑이가 들판 가득 차오른다. 언 땅이 풀리며 내뿜는 숨길이다. 들길에는 냉이와 꽃다리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드문드문 질경이도 보이고 민들레가 줄지어 피어 있는 모습도 보인다. 생명의 환희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나는 휘청, 새 생명의 아우성에 빠진다. 살아 있음이 눈물겹다.

“선생님, 봄은 너무 좋죠?”

“좋구말구”

“나는 살아 있는 게 눈물겨워요. 저 들판의 꿈틀거리는 생명들을 보노라면 눈물이 핑 돌거든요.”

“좋으면 그냥 좋아야지 눈물이 나면 어쩌누?”

“작은 일에 자꾸 감동하면 늙어간다는 뜻인데”·····.'     


또 하나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조지 기싱의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의 <봄>에 나오는 구절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봄을 보는 것이 내게 허락될까? 낙관적인 이들은 여남은 번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겸허하게 대여섯 번이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려 한다. 사실 그것도 많다.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여섯 번의 봄. 첫 애기똥풀이 핀 후 장미가 봉오리를 맺을 때까지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대여섯 번의 봄. 누가 그런 것을 인색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지가 새롭게 옷을 갈아입는 기적과, 지금까지 그 어떤 언어도 제대로 형용할 수 없었던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광경이 내 눈앞에 대여섯 번이나 펼쳐질 터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너무 많이 바라는 건 아닌지 두려워지기도 한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누구는 마라톤을 하고 누구는 자전거를 탄다는데 나는 방에 박혀 책장이나 들척일 수는 없으니, 남들처럼 ‘폼 나는’ 운동은 아니더라도 내주에는 한양도성길이나 한 바퀴 돌아야겠다. 멀지 않아 붓글씨 다니는 도서관 마당에는 눈부신 꽃들로 딴 세상을 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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