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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Mar 30. 2023

이제 와 소설을 써 보겠다고?

소설을 쓰겠답시고 끙끙대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무렵까지, 그러니까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까지였다. 누구의 영향을 받았었던지(아마 막내 삼촌이었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 입학하고부터 소설 읽는 재미에 빠져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계기는 분명치 않다.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 같은 작품에 매료되었거나 막내 삼촌의 책꽂이에 있던 <한국문학전집>(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민중서관인가 어디서 나온, 노란색 하드커버의 책이었던 것 같다)에 수록된 소설들을 읽으면서였을 것이다. 전집에 수록된 장편소설들이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지만 감동을 받기로는 단편소설들에서였다. 그중에서도 김동리, 황순원 그리고 오영수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좋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작품들의 토속성과 향토성에 끌렸던 것 같다. 「황토기」, 「무녀도」, 「역마」, 「독 짓는 늙은이」, 「잃어버린 사람들」, 「화산댁이」, 「은냇골 이야기」 등등. 아마 이 세 분 작가들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을 것이다.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을 거듭해서 읽었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지 ‘나도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학교 백일장에서 쓴 산문 한 편이 상을 받은 것이 그런 무모함을 부추기기도 했다. 쓰고 싶은 소설은 ‘시간이 멈춰 선 듯한 무시간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 배경인’ 소설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앞에서 말한 작가들의 작품 세계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드디어 소설을 쓴답시고 메모도 하고 나름대로 ‘취재’도 한 뒤 (처음부터 주제넘게도) 원고지에 적어본 게 그 시작이었다. 첩첩산중 산골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는데 이야기가 자꾸 기존 소설의 분위기를 따라가고 있어서 20 매도 채 채우지 못하고는 중단했다가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아마 김동리의 「산화」에서 받은 감동이 발단이 되어 그 흉내를 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게 나로서는 처음 시도해 본 소설 창작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나름대로 구상을 해보았지만  대부분 이들 작가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고등학교 때 품었던 소설 쓰기에 대한 꿈은 가시지 않았지만 당시는 연극반 활동에 쫓겨서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설 습작은 하지 않았어도 소설 읽기는 여전했는데, 그때는 당시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던 김승옥, 이청준, 최인호, 황석영 등 소위 ‘6∼70년대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읽었다. 해방 전 작가들의 작품에서 젊은 세대 작가들의 작품으로 그 관심이 옮겨진 것이다.  그중에서도 김승옥과 최인호 작품들을 좋아해서 그들의 단편 여러 편을 베껴쓰기도 했다. 그전 세대의 작가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작품 특성과 감각적인 문장이 마음을 끌었다. 특히 최인호의 초기 단편들은 독특한 소재와 싱싱하고 참신한 비유에 매혹되어 밑줄을 긋고 열심히 노트에 옮겨 적었다. 3학년 2학기 때 단편 소설 하나를 썼다. 그해 여름방학에 있었던 어떤 에피소드를 소재로 쓴 것이었다. 나름대로 꽤 강렬한 인상이 남았던 사건이라 꼭 뭔가 이야기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지방대학 학생을 만나러 갔다가 경험한 것들이었다. 80매 정도 되는 소설이었다. 어찌어찌 겨우 완성을 하고 난 후 읽어 보니 이건 소설인지 수필인지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명색이 소설인데 허구로 엮어 낸 이야기는 전혀 없고 내가 경험한 사실만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게다가 내가 그 사건에서 느낀 진한 감동(그것 때문에 소설로 만들어보고자 한 것인데)은 도무지 느낄 수가 없었다. 소재만 있었지 구성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상상력으로 보충된 대목도 없었다. 소설이 무얼 말하려고 한 건지도 애매했다. 게다가 문장은 장식이 요란한 비유(겉도는)와 겉멋으로 번지르르했다. 최인호 식 문장을 흉내 낸 것임은 누가 봐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소재가 아까워 어찌어찌 살려보려고 애쓰다가 결국 책상 서랍에 처넣고 말았다. 그 뒤로 다른 소재로 단편 소설 하나를 구상했지만 역시 결실을 맺지 못했는데 그래도 소설 쓰기에 대한 욕심은 버리질 못했다. 4학년 때는 엉뚱하게도 역사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에 조선 후기 역사 자료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당시 화제를 모으던 대하소설(『장길산』이나 『객주』 같은)에 자극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사료 조사뿐 아니라 중고서점에서 루카치의 『역사소설론』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그 책을 사기도 했다.(세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 무슨 엉뚱한 짓인지! 졸업과 함께 취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소설 읽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소설 습작 따위는 포기했다. 그때쯤은 내게 그런 재능이 없음을 충분히 깨달은 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이 40년 가까이 지났다. 언젠가 신문에서 대학교수로 은퇴한 분들(한 분은 퇴직 임박해서)이 장편 소설을 출간했다는 기사를 보았다.(그중 한 분이 쓴 소설은 역사소설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저명한 교수였는데 인문학을 전공한 분들도 아니었다. 물론 그분들이 소설을 쓴 게 갑작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꾸어오던 꿈을 실현한 것이라고 했다. 청소년 시절에 문학에 대한 꿈을 꾸었던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그 꿈을 실현으로 옮기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꿈은 (재능이 없이)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그분들이 그 만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본업에 밀려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이라고 봐야겠지만, 무엇보다 그 간절한 꿈을 이루기 위해 수십 년 동안을 포기하지 않고 가슴속에 지녀온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다. 이런 분들의 사례가 자극을 주어서였을까, 뜬금없이 나도 다시 소설 쓰기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물론 어디에 응모를 하거나 책을 낼 것도 아니고 그저 ‘브런치라는 원고지’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니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소설을 써보려는 만용인 셈이다. 그렇다고 지금 무슨 계획이 서 있는 것은 아니고, 구상하고 있는 소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렇게 내질러 놓으면 말(글)에 책임지지 않을 수 없으니 그 강제성에 구속당해 보자는 심산이라고 해야겠다.         



이런 궁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신문 기사 하나를 읽게 되었다. 인간 · 챗GPT 국내 첫 협업 소설집이 나왔다는 기사였다. 7명의 작가와 챗GPT와 함께 쓴 SF단편 7편 모음집이란다. 작가들의 협업 후기에 따르면 ‘시놉시스 형태의 얼개를 제공하면 세밀한 묘사나 구체적인 배경 설정을 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렇다. “주문하지도 않은 복선까지 만들어주어서 놀랐다” 얼개만 주면 살 붙여주고 짧은 문장 하나 주면 그럴듯한 문단을 출력해 준다 “ ”지정된 원고 매수에 맞춰 분량 늘리기에 탁월하다“ 챗GPT가 쓴 결말 손댈 필요 없었다.”······. 

최근에 하도 챗GPT라는 용어가 많이 나돌아 아이들에게 물어서 그 의미를 겨우 알긴 하였는데, 이제 소설까지도 이런 식으로 쓸 수 있다고 하니 도대체 이 세상은 어디까지 나아가려나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또한 내가 앞으로 머리를 싸매고 이야기를 짜내 보려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창작의 세계는 어떻게 변모되는 걸까? 내 지식으로는 답도 나오지 않는 중구난방 같은 질문들을 생각해 보다가 나온 결론은 이것이었다. 쳇GPT가 뭘 하든 어렵게 마음먹은 내 아날로그 식 소설습작은 밀고 나가야 돼!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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