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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May 08. 2023

비가 오는 날이면

어제 비가 왔고 오늘도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두 가지가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60년대에 유행했던 <보슬비 오는 거리>라는 대중가요다. 언젠가의 브런치에도 썼지만 나는 중학교 때 학교 수업을 빼먹고 극장을 전전하며 영화(주로 한국영화)를 구경하러 다녔었다. 매표 시작과 함께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영화 상영이 시작될 때까지 대중가요가 흘러나오는데 다른 노래는 기억에 없지만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 울릴 만큼 또렷이 기억난다. 처절한 노랫말과 구슬픈 곡조가 당시의 우울하고 외로웠던 내 마음에 감정 이입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 후로 나는 이 노래를 참 많이도 들었다. 다른 하나는 대학 3학년 때의 일이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만난 적은 없는) 여학생을 만나러 (사전 예고 없이) 친구와 함께 어떤 지방 도시에 소재한 대학에 갔었는데 그날 마침 그 여학생이 수업이 없는 날이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당일 여행으로 간 것이라 그날 서울로 돌아와야 해서 시내를 돌아다니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강가를 지나게 되었다. 그 강은 안개로 유명했는데 그날 저녁은 유난히 안개가 짙어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친구와 나는 그 풍경에 넋이 빠져 강둑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마지막 기차였는지라 어쩔 수 없이 역 근처 여인숙에서 그날 밤을 지내고 다음날 다시 학교를 찾아갔다. 계획에 없던 숙박비를 낸 탓에 차비가 부족해서 그 학생을 만나지 못하면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 형편이었다. 다행히 학생을 만날 수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우리들의 방문에 매우 당황한 듯했다. 수업을 마치고 그녀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강변의 어느 찻집이었다. 넓은 유리창 너머로 강이 보이고 그 강을 횡단하는 다리가 보였다. 그날은 비가 많이 왔다. 비 내리는 강변의 풍경이 기억에 선한데, 그보다 더 잊히지 않는 건 탁자 옆에 세워둔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이었다. 노란색 우산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찻집에서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문학 이야기도 했고 지방대학생으로서 느끼는 ‘콤플렉스’와 서울의 번화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던 것 같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막막하고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비가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를 했을지 모르겠다. 그때 그 찻집에서 나오던 노래 중에 송창식의 <새는>이 있었다. 많은 노래가 나왔을 텐데 왜 유독 그 노래만 기억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그날 오후 우리는 그 여학생이 '구해다 준' 차비로 서울에 돌아왔다. 나와 친구는 그날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무겁고 울적했다. 그날 이후 그 여학생을 만난 적은 없다. 나는 그 학생이 구해다 준 돈을 갚지 못했다. 나는 그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우울하다. 갚지 못한 차비는 더욱 나를 아프게 한다. 그래서 강변 찻집에서의 비 오는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날씨가 우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커서일까, 눈이나 비, 안개 같은 기상 현상을 소재로 한 노래도 많고 소설도 있다. 특히 비를 배경으로 한 대중가요는 얼마나 많은가. <비 내리는 고모령> <비 내리는 호남선> <비 내리는 명동거리> <비 내리는 영동교>······. ‘비 내리는’을 앞에 붙인 제목만이 아니다. <비의 나그네> <어제 내린 비> <봄비> <가을비 우산 속> <빗속을 둘이서> <보슬비 오는 거리> <빗속의 여인> <빗물> 등등. 이번에 알게 된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라는 노래도 있다.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었는데(아마 노래가 먼저 나오고 영화가 나왔던지 아니면 그 반대일 것이다) 6∼70년대의 한국영화라면 제법 안다고 자부하던 나도 처음 들어보는 영화다. 그런데 제목은 왠지 낯이 익다. 이전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무심코 '비 오는 날 오후 3시'라는 말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보았을까? 비 오는 날 오후 3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아무튼 내가 아는 노래는 90년대 이전 노래가 대부분인데 우리 가요사를 통틀어 살펴본다면 비와 관련된 노래가  얼마나 많을지 짐작할 만하다. 제목에서만 그런가. 가사에서도 그렇다. ‘비에 젖어 한숨짓는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궂은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밤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는’ <덕수궁 돌담길>, ‘비에 젖어 나도 섰고 갈 곳 없는 너도 섰는’ <마포 종점>,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때 그 사람>, '빗소리 들으면 떠오르는' <긴 머리 소녀>······. 일 삼아 찾아보고 열거하자면 A4 용지 몇 쪽이 모자랄 것이다. 가요만큼은 아니더라도 소설에서도 그렇다. <비> 라는 제목의 서머싯 몸의 소설이 있고, <비 오는 날>이라는 손창섭의 단편소설, 황순원의 <소나기>, 염상섭의 장편소설 『취우』(驟雨 :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비) 등. 아예 <우요일雨曜日>이라는 이름을 붙인 조해일의 소설도 있다(조해일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라는 김소월의 시 <왕십리>의 제목을 따서 동명의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특히 비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게 아닌지?). 비를 소재로 한 시도 많을 것 같은데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적지는 못하겠다.      



지난번에 소개한 적이 있던 이규태 선생의 글에 비와 관련된 것이 있다. 1983년 7월 26일 자 칼럼이다. 그 글에 보면 우리 옛 선조들은 특정한 날에는 반드시 비가 내릴 것으로 알았다. 이를테면 ‘음력 5월 10일에는 반드시 비가 내리는데 이를 태종우太宗雨’라 했다. 혹심한 가뭄 속에 임종을 한 태종이 세종에게 “내가 죽어 넋이라도 살아 있다면 반드시 이날만은 기필코 비를 내리게 하리라”라고 유언을 했으며 이 한이 감천하여 이날만은 꼭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7월 1일에 꼭 비가 내리는데 이를 광해우光海雨’라고 한다. 이곳에 유배되어 이날 가시울타리 속에서 죽어간 광해군의 한恨이 비를 내리게 한다는 것. 또한, ‘음력 6월 29일에 진주지방에 내리는 비를 남강우南江雨’라 하는데 이날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 남강에 투신한 숱한 사녀士女의 한이 올올이 비에 맺혀 내린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초 · 중 · 말복에 내리는 비를 삼복우三伏雨’라고 하고(사연이 길어서 다 소개하진 못한다), 견우와 직녀가 1년 만의 상봉을 하는 ‘칠석날에 내리는 비는 눈물을 흩뿌리는 비라 해서 쇄루우灑淚雨’라 했다고 한다. 비 때문에 까치 까마귀들이 오작교烏鵲橋 공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은하의 양편에서 두 연인들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박식함에 고개가 수그러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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