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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May 19. 2023

내 인생의 사진

노년단상 11

 지난주 어느 신문에서 광명시 지역복지관이 운영하는 ‘인생 출판소’ 프로젝트 기사를 읽었다. 광명에 사는 어르신들이 14주 간 매주 한 번 모여 2시간씩 자서전을 쓰는 프로그램이라는데, 수업 마지막 주에는 어르신들과 가족들을 초대해 자서전 출판 기념회를 연다고 한다. 프로그램 2회 차는 자서전 앞쪽에 실을 옛 사진 2장씩을 고르는 ‘소중한 나의 인생순간’ 수업이란다. 자신이 고른 사진에 대해서 제목을 정하고 ‘그 순간이 언제인지, 어디서 누구와 함께 했는지, 이 장면을 왜 지금 기록해야 하는지 이유를 쓰는’ 수업이다. 대체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고 생각한 사진들을 선정하는 것 같은데 그 사연이 다양하다. 젊을 때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A할머니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유치원 앞에서 찍은 사진을 고르며 학부모들에게 인정받는 선생이었던 시절을 회고했고, B할아버지는 군 부사관으로 근무하던 20대 시절, 태권도장 개관식 날 많은 관중 앞에서 품새 시범을 보인 사진을 ‘인생의 순간’으로 꼽았다. C할머니는 ‘등쌀이 유독 심했던 시어머니와의 제주 여행 중 유채꽃밭에서 찍은 사진을 골랐는데, ’사진 속 나는 웃고 있지만, 속으론 울고 있었다‘며 “고달팠지만 건강했고 꿈 많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즐거웠던 가족여행의 한순간이나 강아지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고른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자랑스럽고 대견했던 젊은 날의 모습이나, 가족들과 함께 했던 단란한 시간, 힘들고 고달팠지만 돌아보면 이제는 그리움이 된 추억의 사진들을 고르는 것 같다.       



기사를 읽고 나서 나라면 어떤 사진을 골랐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결혼 이전의 사진들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 3, 4학년까지 찍은 사진을 모아 놓은 사진첩이 하나 있었지만 이사 도중에 잃어버렸다. 그 사진첩과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의 졸업 앨범, 그리고 책 몇 권이 든 종이 상자였다. 가장 아쉬운 것이 가로가 긴 A4 용지 크기 만 한, 초록색 표지의 두꺼운 사진첩이었는데 거기에는 나와 동생의 백일 사진과 돌 사진, 유치원 시절과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의 가족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사진들에는 막내삼촌이 정성스럽게 써서 붙인(막내 삼촌은 글씨를 잘 썼다) 설명이 있었다. 앨범 첫 페이지에 ‘ㅇㅇ(내 이름)과 XX(동생 이름)의 자라나는 모습’이라고 좀 크게 쓴 제목이 있고, 각각의 사진 아래에는 장소와 날짜를 적어 놓았었다.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백일 사진과 돌 사진을 비롯한 몇 장에 불과한데, 어머니와 함께 유치원 앞에서 찍은 사진, 학예회 때 학교 강당에서 토끼 머리 장식을 하고 연극을 하는 사진, 창경원(창경궁) 연못 옆 벤치에서 미군 장교와 찍은 사진,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5형제가 함께 찍은 사진 등이다. 그 앨범에는 아버지, 어머니의 젊었을 적의 사진과 동생의 사진도 몇 장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앨범에 정리되지 않은 (그래서 분실을 면한) 몇 장의 사진이 남아 있는데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식 사진, 신병훈련소에서 찍은 사진, 대학 연극반 시절 사진 몇 장이 그것들이다. 지금 집에 보관하고 있는 사진첩들은 결혼식 사진을 비롯하여 모두가 결혼 이후의 가족사진들로 대부분 여행지에서 찍은 것들이다. 그런 사진들은 사진관에서 찍은 것들이거나 카메라로 찍어 인화한 것들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모두 휴대폰 안에 저장되어 있다. (몇 장 되지 않는) 결혼 전 사진들을 늘어놓고 ‘인생 사진’을 골라보려고 했다. 모두가 흑백 사진이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라고 할 만한 사진이라면 아무래도 대학 졸업식 사진이 적당할 것 같았다. 졸업 전에 일찌감치 대기업 입사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축하해 주러 온 가족 친지들을 양 옆으로 거느리고(?) 학사모를 쓴 환한 얼굴의 내 모습은 그야말로 ‘인생 사진’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사진에 손이 가지 않았다. 이 사진은 빼고 저 사진은 치우고 나니 두 장의 사진이 남았다. 그중 하나는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이다. 졸업장을 넣은 긴 원통형의 케이스를 손에 든 내 오른쪽에는 슬픈 표정의 숙모님(아마 그때 시집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을)이 서 계셨고 왼쪽에 선 아이는 키가 나보다 한 뼘은 컸던 동갑내기 사촌이었다. 진눈깨비인지 눈인지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어머니는 졸업식장에 오시지 않았다. 집에서 몸져누웠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해 말인지 다음 해 초인지 나는 중학교 입시를 치렀고 그리고 낙방했다. 어머니는 내가 ‘일류’ 중학에 입학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나는 낙방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반년 남짓 어머니가 기울인 '각별한 정성'에 나는 부응하지 못했다.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현실에 어머니가 졸업식을 참석하실 리가 없었다. 그래서 숙모님이 대신 오신 것이다. 숙모님의 얼굴이 슬픈 표정인 것은 당연했다. 그 사진이 ‘화양연화’에 어울릴 리가  없지만 나는 그 사진을 골랐다. 내 인생 첫 경쟁에서의 실패가 이후 내 성격 형성과 삶에 미친 영향이 결코 작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 장의 사진은 연극반 첫해 봄 공연의 커튼콜 장면이었다. 대사 두 세 마디에 불과한 단역이었는데 그래도 출연자라고 오른쪽 맨 끝에서 ‘짤리지 않고’ 서 있는 사진이다. 연극부장이 무대 앞으로 나와 뭐라고 인사말을 하는 장면인데 나는 무슨 죄를 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 그래도 누가 준 것인지 꽃다발을 들고 있다. 두 손을 앞에 모은 공손한 자세다. 연극에 첫발을 디딘 해, 그리고 첫 공연, 첫 배역. 나는 이 사진을 내 인생의 화양연화로 꼽고 싶었다.     



예전에는 돌이거나 환갑, 입학과 졸업 같은 특별한 날에는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깨끗이 매만지고 사진사의 주문에 따라 자세도 몇 번씩 고친 다음에야 겨우 사진 한 장이 완성되었다. 그러다가 카메라가 일반화되었다. 다 찍은 필름은 사진관에 맡겨서 인화를 했다. 사진에 나오는 사람 수만큼 여러 장을 뽑아서 나누어 주었다. 인화한 사진은 가지런히 앨범에 보관하거나 봉투에 담아 보관했다. 문득 생각이 나면 앨범을 들쳐보거나 바닥에 깔아 놓고 당시를 되돌아보곤 했다. 시간이 만든 색깔, 손끝에 닿는 질감, 그리고 그 네모난 공간 속을 어른거리는 기억······. 지금은 휴대전화로 찍는다. 누구나 언제든 찍는다.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사진관에 맡겨 인화(맞는 말인지 모르겠다)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도 그렇다. 식구들의 휴대전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수천 장의 사진들. 이제 인생 사진을 고르려면 몇 시간 동안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화면을 밀어내야 한다. 스쳐가는 풍경처럼 밀려나는 사진들 속에서 과연 ‘내 인생의 사진 한 장’을 고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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