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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Jun 11. 2023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노년단상 12

최근 몇 건의 부고訃告를 들었다. 계절이 바뀔 때 초상이 많이 난다더니 지금이 그런 시기인 것 같다. 내 또래의 경우 열에 아홉은 모친상인데 여자들의 평균 수명이 길다는 말이겠다. 또 그중 일고여덟은 말년을 요양원에서 지내다 임종을 맞은 분들이다. 대부분 80대 후반이거나 90대다. 부고를 듣고 부의금만 보내는 경우도 있고 직접 문상을 가기도 한다. 문상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일류’ 종합병원의 장례식장은 ‘거대하고 장엄’하다. 비록 며칠에 지나지 않지만 죽은 후의 거처에도 랭킹이 있는 것 같다. 고인(또는 자손)의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 적어도 이런 정도의 장례식장은 되어야 한다는 통념상의 기준이 있다고 해야 할까. 복도 양쪽에 도열해 있는 많은 화환에 쓰인 이름의 직함은 회장이거나 사장이거나 대표들이다. 그 흔한 사장도 대표도 해보지 못한 씁쓸함을 느끼며 해당 망자의 호실을 찾아간다. 익히 알아온 고인이 아닐 경우, 그 문상의 ‘프로토칼’은 얼마나 어색한가. 입구에서부터 애써 엄숙한 표정을 짓고 가만가만 신을 벗고 들어가서(안내하는 이가 재빨리 내 신을 무슨 갈고리 같은 것으로 집어 들어서 신발장에 넣는다) 분향을 하거나 국화 한 송이를 올린 후 망자나 문상객의 종교에 따라 목례나 절을 하는데, 특히 절을 할 때는 오른편에 서 있는 상주들의 눈길이 의식되어 뒤통수가 따갑다. 그리고는 상주들과 맞절을 하는데(요즘은 서서 목례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해야 할 말이 참 궁색하다. 동행이 있을 경우는 대개 그에게 인사말을 미루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 그럴 때면 고작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더 오래 사셔야 하는데 애통한 마음입니다. “ 같은 ‘문어체 어법’으로 한두 마디를 건네고는, 내 말주변 없음을 속상해하며 어서 그 어색한 순간을 벗어나고자 한다. 작년 언젠가 아직 마스크 착용 해제가 되지 않았을 때 직장 동기의 모친상에 문상을 갔을 때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3형젠가 4형제가 모두 비슷한 체격에 안경을 끼고 같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어서 얼른 구별이 되지 않았다. 동행한 친구가 그중 한 명의 손을 잡고 인사말을 하길래 이어서 나도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동기(라고 생각한)의 반응이 영 이상해서 의아해하며 빈소를 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형님 중 한 분과 인사를 나눈 것을 알고는 어처구니없어했었다. 이 무슨 코미디극인가?



장례식장에 다녀올 때마다 오래전 읽은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떠오른다. 이 소설은 재판관으로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온 이반 일리치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질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심리 상태를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죽음은 그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는 절실한 것이지만 그 이외의 사람에게는 ‘남의’ 일이다. 막상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접하고서도 정작 자기와는 무관한 ‘사건’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의 죽음이 자기에게 미친 이해관계에 대한 이기적인 관심,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이 보이는 이중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특히 장례식장에서의 조문 풍경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명작이다.      



내게는 올해 백수白壽를 맞은 노모가 계시다. 아직 정정하시지만 그래도 이제 가실 날이 그리 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문상을 하러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늘 내게 닥칠 의례儀禮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동생은 오래전에 해외로 이주해 살고 있으니 나 혼자서 치러야 할 행사다. 요즘이야 3일장이라 경황 중에 후딱 지나가버릴 일이겠지만 하나하나의 절차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닐 것 같다. 노모는 돌아가시면 고향 선산에 매장될 예정이다. 화장이 8∼90%를 넘는 시대라지만 아직 유교 풍습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우리 집안으로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노모의 세대까지는 매장 풍습을 유지할 것이다. 아버지의 산소 옆에 쌍봉을 쓰기로 자리를 정해 놓은 지 오래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선산으로 운구된 시신은 상여에 올라 정해진 매장 의례를 따랐지만 이제 상여라는 게 있는지도 의문이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멜 사람도 없다. 고향에서의 장례 풍경을 보지 못한 지도 오래라서 이즈음의 절차가 어떻게 운용되는지 감감한 형편이니 이 또한 불안하다.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내 고향에서 이런 유교적 풍습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즈음에 돌아가신 백모의 장례는 고향 집에서 치러졌다. 사랑방 대청마루에 빈소가 차려졌고 상주들은 굴건제복屈巾祭服을 입었었다. 마당에 차일을 치고 문상객을 접대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어르신들이 전통 절차를 주관해서 상을 치르고 곡을 했다. 사망 직후, 시신을 보지 않은 사람이 지붕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망자의 속적삼을 흔들며 망자의 성과 이름, 주소를 부르고 복復, 복, 복 하고 세 번을 외치는 초혼招魂 풍습도 있었다. 육체를 빠져나간 혼이 다시 돌아와 살아나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의식儀式이라 했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을 보면 과거 유교 식 장례가 얼마나 복잡하고 번거로운 것이었던지 짐작할 수 있다. 백모의 장례식 후로도  가까운 친척의 죽음이 몇 번 있었지만 국립묘지에 안장되거나, 화장해서 납골당에 안치되고 또는, 유골만 선산 한 곳에 매장된 사례를 들었을 뿐 이즈음의 상황은 자세하지 않다. 요즘은 오히려 오래전 선산에 매장된 시신을 화장한 후 서울 근교로 이장하는 것을 고려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변해가는 풍습의 끝자락에 놓일 모친의 장례 절차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그래서 더욱 부담이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사후 처리에 대한 희망을 분명하게 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화장 풍습은 당연한 일일 테니 납골당에 안치할 것인지, 수목장을 할 것인지, 가족 묘지를 조성할 건지 생전에 의논을 해 두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더불어 관혼상제冠婚喪祭의 통과의례 중 아직 그 의식의 번거로움이 남아 있다고 해야 할 婚과 葬의 간소화를 위한 노력도 필요한 일이다. 이미 제사에 대한 생각은 많이 변했다. 코로나19 전만 해도 우리 집안은 제삿날이면 서울에 사는 종반들이 모두 모였었는데(그걸 '돈독한 우애'라고 부러워 한 사람도 있었다), 코로나19가 그걸 중단시키더니 엔데믹이 되고 나서도 이제 자연스럽게 제사는 제각기 자기 가족들끼리만 지내는 걸로 바뀌었다. 아마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제삿날이면 북새통을 이루며 주부들의 진을 빼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결혼 의례에서도 우리 아이들을 봐도 그렇고 요즘 젊은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고 있는 듯하다. 팬데믹이 그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학자들이 세상을 팬데믹 전과 후로 나누는 것에 공감이 간다. 그런데 정말 변해야 할 사람들은 우리 같은 어른들인 것 같다. 아직도 이런저런 이해관계와 체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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