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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Nov 04. 2023

백 년을 산다는데

노년단상 14

며칠 전 생년이 홀수인 아내의 건강검진에 동행했다. 이 달 저 달 미루다 이제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 해가 아직 두 달이나 남았을 때였으니 나보단 낫다. 나는 매번 12월, 그것도 25일도 지나 벼랑 끝에 몰려서야 아이들의 성화에 등 떠밀리듯 해오곤 했다. 특별히 몸 어느 부위에 ‘고장 경고’를 받은 적이 있어 그 검진 결과가 걱정이 되어서가 아니다. 검진 과정 자체가 번거롭기도 하고 지난번에 없던 어떤 징조가 나타난 건 아닐까 하는 누구나가 다 하는 걱정 같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다 보니, 또 허약체질인 나로서는 이곳저곳 고장이 없을 수가 없다. 20여 년 전에는 위 천공으로 큰 수술을 받았었고, 10여 년 전부터는 갑상선에 문제가 있어 (평생 먹어야 한다는) 약을 복용하고 있다. 그래서 위 내시경과 갑상선 초음파 검사는 일정한 주기의 ‘필수 검진 항목’으로 권유받는다. (여담인데 이런 병력이 있다 보니 무슨 예방 주사 같은 걸 접종받을 때나 다른 질환으로 진료를 받을 때는 언제나 이런 사실을 적거나 말해야 한다.) 우리 나이에 흔하게 목격하는 당뇨나 고혈압 같은 증세는 없어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건강검진 결과 정밀검사를 받으라는 통고를 받을 땐 가슴이 철렁하는 경험은 누구나 했을 것이다. 아내의 경우도 그랬다. 재작년의 검사에서 2차 검사를 받으라는 통지를 받고 꽤나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 크게 걱정할 만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일정 기간 추적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 경험이 있는지라 아내는 이번 검진 때에도 겉으로 표시는 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건강 검진 결과 통보가 올 때까지 다소 긴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두 달 만 지나면 100세(세는 나이로)가 되는 어머니(우리 문중에서 두 번째로 연세가 많다)는 평생 건강검진이라는 걸 받은 적이 없다. 약간의 고혈압 증세가 있어 먹는 약 말고는 복용하는 약도 없다. 병원은 그 연세라면 흔한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간 것(그것도 최근 몇 년 사이 한두 번)과 감기 등 가벼운 증세로 동네병원에서 항생제 처방을 받아온 정도가 전부다. 종합병원에는 가본 적도 없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마실을 다녔다. 요즘도 삼시 세끼 왕성하게 식사할 뿐 아니라 중간중간 간식도 챙겨 드신다. 나이를 짐작케 하는 징조라면 귀가 어두워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그러다 보니) 남의 말은 듣지 않고 당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코로나19 탓도 있었지만)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데 집에서도 낮에 잠시 낮잠을 자는 것 빼고는 내처 당신 방에 꼿꼿이 앉아서 좌선하듯 하거나 무슨 불경 같은 것을 읊조린다(본인 말로는 기도하는 것이다). 이침에 일어나는 시간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거의 일정하다. 아침 식사 후 믹스 커피 한잔, 그리고 낮에 우유 한 컵과 꿀물 한두 컵을 마신다. 하루 일과의 거의 대부분이 정해진 일정표를 따르듯 습관화되어 있다. 주위에서 말하듯 어머니의 건강은 타고난 것이다. 그에 더해 의도적이든 아니든 건강관리가 철저한 것이다. 내가 보기로는 신체적 조건 못지않게 정신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일찍 혼자되어 가정을 꾸려나가면서 체화된 강인함이나 생명력 같은 것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혹자는 말한다. 건강(수명)은 모계를 따른다고. 그러면서 ‘자네 어머니가 저리 건강하게 장수하시니 자네도 오래 살 걸세’라고. 그런데 그 말이 꼭 반갑지만은 않다. 100세까지 장수하는 게 꼭 복된 일이기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제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얼마 전 어느 신문에 실린 글이 인상적이어서 스크랩을 해두었다. 연세암병원 황세희 의사가 쓴 글이다. 흥미 있는 내용 몇 가지를 적어본다. 공식적으로 세계 최장수인은 잔 칼망이라는 사람인데 122년 164일을 살았다. 이 분은 85세에 펜싱을 시작했고 110세까지 자전거를 탔다고 한다. 현재 100년 인생을 사는 백세인은 1만 명 중 3명(0.03%)이며 그중 여성이 85%이다. 이들 1,000명 중 한 명은 110살을 넘겨 초백세인이 되는데 95%가 여성이다. 이런 최장수인은 특별한 ‘장수 유전자’를 타고난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운동 · 식단 · 수면 · 스트레스 관리 등을 꾸준히 실천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과연 우리 어머니가 그런 경우다). 고려와 조선시대 국왕의 수명도 흥미 있는 내용이다. 고려시대 34명의 왕 중에서 6명이 60세 이상 생존했고, 가장 오래 산 왕은 충렬왕으로 72세였다. 조선시대 평균 수명은 왕이 46.1세, 왕비 51세, 후궁 56.6세이며 일반 백성은 35세로 추정된다고 한다. 27명의 조선 왕 중 환갑을 넘긴 사람은 태조를 비롯 5명이다(최장수는 영조다). 2022년 기준 OECD 국가들의 기대수명은 80.5세이고 한국 사회의 기대수명은 83.5세이며 노인 인구는 960만 명이라고 한다. 고령화가 지금처럼 지속되면, 2050년에는 0∼64세 인구보다 65세 인구가 많은 국가가 된다. 황 교수는 조언한다. 100세 시대 노후를 잘 보내려면 젊을 때부터 의식적으로 좋은 언행을 반복 연습해 몸에 배게 해야 한다고. 뇌의 퇴행성 변화로 인지 기능 등에 이상이 생기는 상황이 100세 시대의 가장 큰 걱정인데, 이런 행동은 노화 때문이기보다는 원래 내재해 있던 나쁜 인격을 통제하는 힘이 약해지면서 드러나는 것이기에 일찍부터 그런 연습을 통해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상 · 독서 · 봉사활동 · 문화생활 등이 정신건강을 풍요롭게 만드는 묘약’이라고 했다. ‘100년’은 길고 긴 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다. 사위를 ‘백년손님’이라고 하고 오래된 가게를 ‘백 년 가게’로 지정한다. ‘백 년 동안 잠자는 공주’, ‘백 년 동안의 고독’, ‘백 년 묵은 여우’ 등등. 그 길고 긴 세월이 이제 우리 삶의 보편적인 단위로 다가오는 것이다.      



두어 달쯤 전부터 나는 거의 매일 아내와 함께 동네 공원을 산책한다. 걷는 운동이다. 1시간 반쯤 걷는다. 그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하던 것이다. 같이 걷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다투는 일도 있다. 아무래도 전보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대화가 좋은 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히려 나쁜 쪽으로 번져서(안 해도 될 말을 하게 되고, 마음 상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분위기가 싸늘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같이 걷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얻는 것이 더 많다. 우선은 몸에 좋고 시간도 잘 가고, 그리고 대화를 통해 공감하는 경우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걷기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구경 다닐 때도 동행하는 경우가 늘었다. 그전까지는 주로 나 혼자서 다녔다. 아내의 취향이 꼭 나와 같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누군가와 동행하면 온전한 감상이 되지 않을 때가 있어서다. 나는 한 주에 하루 이틀은 갤러리나 박물관을 찾아다닌다. 특별히 예술에 안목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무료한 시간을 그렇게 해서라도 때워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아내를 동반한다. 더불어 맛 집도 미리 알아본다. 맛 집 찾기가 의외로 재미있는 일이다. 최근에는 동네도서관에서 김석동 전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쓴 맛 집 책을 빌려와서 가볼 만한 곳들을 적어 놓고 외출할 때마다 찾곤 한다. 문화생활이 정신건강을 풍요롭게 만드는 묘약이라고 했으니 우리 부부는 ‘묘약’ 중의 하나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백세를 살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는 동안 “아, 이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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