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했지만 미련했던 화란댁의 영어 공부 이야기

내 운명(Destiny)은 치과의사(Dentist)였다

by 이루다니

27.03.2026

날씨: 비가 오락가락, 내 영어 자신감처럼 갈피를 못 잡는 하늘.

상태: 영어에 대한 미련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벼워짐.


연애할 때만 미련이 생기는 줄 알았다. 그런데 48살 아저씨가 영어에게 이토록 구차한 미련을 가질 줄은 몰랐다. 중고등학교 때 이 마음이었으면 지금쯤 원어민이 됐을 텐데, 인생은 참 타이밍이 안 맞는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영어를 무시하고 살았다. 아니, 잊고 살았다.


공무원 시험에 영어가 있었지만, 그건 언어가 아니라 점수였다. 20개 문항의 고비만 넘기면 되는 서커스 같은 과목이었다.


공직에 들어온 뒤로는 영어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영어를 못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


어느 날, 직원들과 이야기 하다가

“나에게 중요한 건 나의 덴티스트(Dentist)야.”라는 말을 했다.


직원들이 잠깐 멈췄다. 누군가 말했다.

“팀장님, 데스티니(Destiny) 아닌가요?”

“맞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고마워.”


그렇게 나는 영어에 대한 무식함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고 나는 토종 한국이니까. 한국 사람이 한국 말만 잘하면 되지.(그래서 그렇게 술 자리에서 말이 많나.)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에 장난인가. 영어를 그토록 무시했던 내가 영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에 떨어지고 말았다.


영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마트도, 버스도, 이웃집 인사도 쉽지 않았다. 밖에 나가는 것이 점점 무서워졌다.


amador-loureiro-BVyNlchWqzs-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Amador Loureiro


그래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부가 아닌 지름길 찾는 공부법을 서칭하기 시작했다. 찾고, 계획 세우고 며칠 가서 또 찾고, 계획 세우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영어는 그대로였고, 손가락만 빨라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크롤을 움직이다 한 유튜버를 만났다.

“공부법 찾는 영상 그만 찾고 당장 공부해.”

뜨끔했다.


와이프 추천한 강의를 전수받았다. 100일 동안 매일 문장을 외우는 방식이었다. 정말 열심히 했다. 함정은 100일이 끝나고 나서야 보였다. 와이프는 영어를 잘한다. 나는 발바닥이다. 와이프한테 찰떡인 강의가 나한테는 사치였다. 나는 4~5세 수준의 영어부터 했어야 했는데, 영어 공부에 허세를 부렸다. 시간과 돈을 날렸고 자신감은 땅을 파고 지하실로 들어가버렸다.


그 때 와이프가 위로해주었냐고. 그러게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적군 중에도 최고의 적군이었다.

“아니 대학은 어떻게 들어간거야. 중고등학교 때 영어 공부 안했어. 이제 그만해.”


사람을 파도 그렇게 아프게 팔 수가 없었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지 못하고 AI에게 위로를 받았다.

“영어는 금방 늘지 않는다. 하루 30분만 하고, 나머지는 당신의 삶을 살아라. 대신, 멈추지만 말자.” 깔끔하고 명료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멈췄다. 억지로 밀어붙이던 걸 멈췄다. 그리고 하루 30분만 하기로 했다. 시장 보고, 인사하고, 겨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시간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에 쓰기로 했다.


그 길에 찾고 계획 세우고, 찾고 계획 세우고만 하면 안 되는데. 잘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