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해상에서 보낸 20개월, 영해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
30.03.2026
날씨: 내 영어 실력만큼이나 흐릿하고 알 수 없음.
상태: 20개월 차 베테랑 주부의 은밀한 고백.
2024년 여름,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나는 내가 무언가 큰 일을 만들 줄 알았다. 17년 동안 몸담았던 공직 사회를 뒤로하고, 꼬부랑 글씨가 가득한 나라로 떠나는 46세 아저씨의 패기! 겉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결단이라 했지만, 나 역시 새로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생각에 꽤 신이 나 있었다.
떠나기 전,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야, 너 전생에 나라를 몇 개나 구한 거냐. 네 팔자가 상팔자다!”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정말 구국공신쯤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시간이 쌓일수록 대단한 일은 청소, 주방 그리고 육아를 책임지는 일이었다. 블록버스터 어드벤처가 될 줄 알았는데 가족 코믹 휴먼 다큐가 되어버렸다. 17년 차 공무원의 직함은 사라지고, 나는 5시 30분에 기상하는 인간 알람이자 도시락 제조기, 청소기 그리고 육아 도우미로 재탄생했다.
매일 아침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가는 것이 일이다. 아침의 분주함이 사라진 자리에 청소기가 차지하고 잠깐 앉아 숨을 돌리고 나면 다시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된다.
학교 앞은 또 다른 전쟁터다.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아이들은 도무지 집에 갈 생각을 안 한다. 나는 땡볕 아래 서서 아이들이 내던진 책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채, 다른 나라 부모들 사이에서 웃음만 짓는 마네킹이 된다.
가끔 한국 부모라도 만나면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다.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오는 모국어의 짜릿함! 뇌 세포 100%를 동원해야 겨우 한 문장이 나오는 영어 대화는 고문이 따로 없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 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듣는다. 숙제가 하나 있었다. 당신의 나라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2분 동안 말하는 숙제였다. 어떤 말을 할까. 고민하다 2분짜리 원고를 만들었고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육아와 집안일이다. 회사 다니는 일이 더 쉬운 일이다. 이제는 다시 일하고 싶다.”
나라를 구한 대가는 우아한 이민 생활이 아니라 하루하루 집안 일과 아이들과의 전쟁이었다.
이제 이 고난의 행군도 4개월 남았다. 20개월 전, 인천공항을 떠나며 “2년 뒤에 보자!”라고 외쳤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2년이라는 시간이 꽤 길 줄 알았는데, 어느덧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 내 삶은 여전히 공해상에 떠 있다. 한국 영해를 떠나 낯선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며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고, 이방인의 시선에 움츠러들기도 하지만, 덕분에 나는 비로소 알게된 것이 있다.
묻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통하는 내 모국어. 내가 당연하게 누렸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거대한 안식처였는지를.
이제 4개월 뒤 다시 돌아간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오늘이 그리울 수 있겠지만 이제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