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버트 하임에서 찾은 배 음료, 어남선생 제자 되다

아빠라는 자판기

by 이루다니

02.04.2026

날씨: 구름 사이로 해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 삼겹살 굽기 딱 좋은 밀당의 봄날.

상태: 류수영 레시피를 좋아하는 어남선생 네덜란드 지부장.

해외 살이에서 언어 장벽이나 인종 차별은 외적인 문제다. 내가 안 들리는 척, 안 보이는 척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음식은 다르다. 이것은 지독하게 내적인 문제이다. 아침에 눈 뜨면 배가 고프다. 점심에도 고프고 저녁에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나를 한 시도 가만두지 않는 이 식욕이야말로 진정한 생사의 문제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에게 총알이 필요하듯 나에게는 식재료가 필요했다. 다행히 아시안 마트인 어메이징 오리엔탈에서 웬만한 건 구하지만 내 영혼의 갈증을 채우기엔 2% 부족했다. 결국 나는 가끔 국경을 넘는다. 차로 1시간 30분을 달려 독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오아시스를 찾아간다. 한국 제품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로 마트다. 내 모습은 마치 보급로를 확보하러 가는 특수부대원 같다.

KakaoTalk_20260402_102514783.jpg


재료가 갖춰졌다고 끝이 아니다. 매일 3끼를 만들어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때 내 삶에 강림한 분이 바로 요리신인 류수영님이다. 유튜브를 통해 영접한 그분의 레시피는 나의 바이블이자 생명줄이었다. 파스타부터 소갈비찜까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나는 네덜란드의 미슐랭 셰프가 됐다.

단 하나, 그분의 필살기인 배 음료를 구하기 어려웠다. 절망하던 찰나 한인 단톡방에서 첩보가 들어왔다. 현지 마트 알버트 하임에 가면 비슷한 게 있다는 것! 당장 달려가 이름 모를 서양 배 음료를 낚아챘다. 한국 맛보단 덜 달지만 이게 어디냐. 류수영님이 넣으라는 곳에 왕창 들이부었더니, 비로소 고향의 맛이 완성됐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다음 과제는 김치였다. 김치통이 없어서 계속 소량으로 만들던 중 운 좋게 한국으로 복귀하는 지인에게서 10kg 김치통을 받았다. 김치가 쌓이니까 메뉴가 늘어났다. 삼겹살 옆에 묵은지를 굽고, 묵은지 베이스의 등갈비찜과 닭볶음탕을 슥슥 해냈다. 비 오는 날은 김치전까지 해냈다. 집 안에 전 냄새가 진동하면 여기가 종로 빈대떡 골목인지 헷갈릴 정도다.

KakaoTalk_20260402_100835127.jpg


이쯤 되면 아이들이 나를 우러러봐야 정상이다. “얘들아, 네덜란드 하늘 아래서 삼겹살에 묵은지를 구워 먹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 줄 알아? 아빠가 이 김치를 위해 독일 국경을 넘나들었다고!”


하지만 돌아오는 건 찬바람 쌩쌩 부는 핀잔뿐이다. “아빠, 오늘 좀 짜다.”“고기가 좀 질긴 것 같은데? 다음엔 좀 잘해봐.”


이건 뭐, 전생에 나라를 구한 구국공신 대접은커녕 그냥 입맛 까다로운 상전 모시는 밥 차리는 아저씨 신세다. 가끔은 “너희 다른 집에 가서 일주일만 살아볼래?”라고 응수하지만, 녀석들은 콧방귀도 안 뀐다.

KakaoTalk_20260402_100940316.jpg


그래도 가끔 보람을 느끼는 반전의 날이 있다. 아이들 외국 친구들이 놀러 와서 내 음식을 먹을 때다. 내가 해준 한식을 먹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어메이징! 네 아빠가 진짜 요리사야?”라고 묻는 외국 아이들의 눈빛! 그제야 내 자존감은 공해상을 넘어 성층권까지 솟구친다. 내 자식들이 좀 저렇게 표현해 주면 얼마나 좋으련만 녀석들은 여전히 무심하게 먹기 바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들의 그 무심함이 가장 큰 칭찬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한국 음식을 당연하게 먹고산다는 건, 아이들에게 고향에 대한 결핍이 없다는 뜻이니까. 돼지갈비, LA갈비, 떡볶이, 프라이드치킨. 아빠라는 자판기를 누르면 척척 나오는 한식 덕분에 녀석들에게 네덜란드는 살만한 나라가 된 것이다. 아빠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KakaoTalk_20260402_101219498.jpg


이제 4개월 뒤면 이 치열했던 주방 전쟁도 끝난다. 요즘은 새로운 레시피를 찾기보다 익숙한 메뉴들을 돌려 막기하며 완주를 준비 중이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한국의 어느 식당에 앉아 남이 해준 밥을 먹고 있겠지? 그때가 되면 류수영님 레시피를 뒤지며 배 음료를 찾아 헤매던 이 공해상의 주방이 조금은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내일 아침 아이들이 투덜거리지 않을 음식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