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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와 사랑 Dec 08. 2022

학부모와 부모

  큰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전자사전이 고장 나 수리를 맡기는 과정에서 녀석의 전자사전에 TV 오락프로가 다운로드되어 있는 것을 보고 혼내준 적이 있다. 있는 사실만 혼내준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덧붙여서 한참을 혼내는 동안 녀석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보니 전자사전이 고장 나기 전 온 가족이 처갓집이 있는 정읍을 거쳐 부안 등 여행을 갔다 온 적이 있는데 그때 차 안에서 보려고 다운로드한 것을 내가 지나치게 확대했던 것이다. 부모라는 명목으로 아이에게 무차별적으로 언어폭력을 휘둘렀던 내가 부끄러웠다.


“부모는 꿈을 꾸라 하고, 학부모는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는다. 부모는 멀리 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한다. 당신은 부모인가, 학부모인가?' 부모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 참된 교육의 시작입니다.” 운전 중에 무심코 들었던 이 말이 부끄럽게 가슴속에 와닿았다.


  아이가 모의고사에서 형편없는 성적을 받아 왔을 때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퍼붓고 말았다.   화를 낸 후 생각해 보니 내가 문제였다. 아들 녀석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공부에 지쳐 스트레스를 받을 만도 한데 짜증 한번 안 내고 밝은 모습으로 학교생활 잘하고 있는 녀석에게 부모 된 욕심으로 기대치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인해 화를 낸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 지난날을 돌이켜보았을 때 공부를 잘한다고 반드시 잘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성격 좋고 활달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잘 풀린 것 같다. 나는 부모가 아닌 학부모의 욕심으로 아이를 다그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며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무슨 짓을 해도 이쁘고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더니 아이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공부를 조금만 못해도 잡아먹을 듯이 닦달하는 것이 우리나라 부모들의 실상이라는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났다.


  몇 년 전 10여 년부터 베란다에서 길러 오던 다래나무를 산 쪽 담장 밑에 심어주었다. 귀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애착을 가지고 키워왔으며 열매를 맺은 적도 몇 해 있었지만 길게 뻗어나가야 할 가지도 싹둑 잘라 내버릴 수밖에 없었고 여름만 되면 잎이 시들시들해져 볼품없어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다래나무가 있는 곳을 지날 때 가끔 잘 자라고 있나 살펴보니 집에서와는 달리 잎이 파릇파릇해지고 담장을 따라 산 쪽으로 쭉쭉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동안 내 부질없는 욕심이 쭉쭉 뻗어나갈 가지를 잘라내고 시들시들 근근이 생명만 유지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다래나무를 볼 때마다 나만의 욕심에서 벗어나 놓아주고 비우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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