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낚시에 입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여년 전 여름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외삼촌의 농장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외삼촌과 동업을 하던 아저씨가 어느 날 갑자기 낚시를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선 곳이 운암댐(옥정호)이었다. 정읍에서 칠보를 지나 그때까지만 해도 비포장도로였던 산길을 꾸불꾸불 한참을 지나 섬진강 상류에 자리한 운암댐에 도착했는데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30여 마리가 넘는 흑염소 떼를 몰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세히 보니 아이는 맨 앞에 있는 한마리만 몰고 가는데 나머지 염소들이 뒤따라가는 것이었다. 해가 지기 2시간쯤 전부터 사람의 왕래가 없고 수심이 깊은 곳에 자리한 아저씨와 5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멍텅구리(인찌끼) 낚시를 하던 내게는 간간히 붕어가 한 마리씩 잡히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밤10시가 넘도록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아저씨는 말이 없어졌고 말을 할 때도 속삭이듯 말하였다. 처음에는 초짜인 내가 아저씨보다 많이 잡았다는데 으쓱해하고 있었는데 밤12시가 다되도록 잔챙이 붕어 몇 마리밖에 잡지 못한 것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지루한 시간이 계속 되면서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날따라 그믐달이어서 캄캄한 산속 호숫가에 적막이 감돌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나지막한 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싶어 아저씨 곁으로 갔더니 낚싯대를 두 손으로 곧추 세우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고 아저씨는 내게 뜰채를 펴서 물에 담그라고 했다. 몇 분간의 힘겨루기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팔뚝만한 잉어였다. 나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있었고 아저씨가 뜰채로 떠달라고 해서 뜰채를 갔다 댔는데 잉어가 마지막 몸부림을 치며 뜰채를 피해갔다. 한 번의 실패 끝에 건져 올린 잉어는 68cm짜리 대물이었다. 나는 놀라서 “엄청 크네요!”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는데 아저씨는 별로 크지 않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때까지 낚시를 잘 몰랐던 나는 한편으로는‘잉어 한 마리 잡으려고 밤새 그 고생을 했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훗날 낚시를 자주 다니게 되었을 때 그날 아저씨가 잡은 잉어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준비와 기다림 끝에 올린 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저씨는 낚시를 가기 며칠 전부터 낚싯대를 점검하였고 대물 채비인 지누 5호라는 대물용 낚싯바늘을 일일이 손으로 묶으며 한번 걸으면 놓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곤 했다. 댐에서 68cm 잉어를 끌어올리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훗날에야 할 수 있었다. 아저씨와 헤어진 후 나는 혼자서 낚시를 다니기 시작하였고 낚시를 그렇게 배운 탓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큰 바늘을 일일이 묶어서 사용하던 내 낚시생활의 정점은 교도관이 되기 전 2년여 전부터 교도관이 된 후 3년여 간이었는데 물 좋고 경치 좋은 낚시터를 찾아다니며 대물 위주의 낚시를 하곤 하였다. 붕어는 월척인 32cm짜리를 수십 마리 잡아 봤지만 잉어는 월척급(60cm)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45cm가 나의 한계였다. 지금은 양어장 등 유료 낚시터에 큰 고기들을 풀어 놓아 월척을 잡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한창 낚시를 다니던 때만 해도 10여년 넘게 낚시를 수없이 다니면서도 월척을 낚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고 때문에 월척조사란 말은 낚시꾼들에게 매우 자랑스러운 말이었다.
10여전부터 낚시와 담을 쌓고 지내던 내가 최근에 낚시를 잘하는 직장동료를 따라 낚시터에 따라갔는데 낚싯대와 바늘, 떡밥 등 모든 면에서 한참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나오는 낚싯대는 가늘고 가벼우며 세련된 것임에 비해 내 낚싯대는 투박스러웠고 바늘도 다른 사람에 비해 컸다. 요즈음엔 낚싯바늘도 직접 묶지 않고 바늘 묶는 기구로 묶고 있었다. 함께 낚시를 간 직장동료로부터 “요즈음 미늘 있는 바늘 쓰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예전처럼 낚시를 자주 다니는 것도 아니고 가끔 한 번씩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따라 나서는 낚시, 잠시 들렀다 오는 정도의 낚시라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직장동료의 말을 무시하고 지냈는데 요즈음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 하천물이 깨끗해지면서 낚시꾼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해 나도 산책을 나가 한 시간 정도 낚싯대를 담갔는데 10cm 남짓 되는 붕어를 잡아 바늘을 뺄 때 주둥이에 상처가 나 피가 나는 것을 보고 미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미늘은 반드시 잡아야겠다는 욕심, 한번 걸은 것은 놓치지 않겠다는 인간의 결연한 의지인 것 같다. 창끝이나 화살촉의 미늘은 사냥이나 전쟁에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어 반드시 잡거나 승리하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낚싯바늘의 미늘도 그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먼 옛날에는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물고기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 했겠지만 현재는 치명적인 상처를 주면서까지 잡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내가 가지고 있는 낚싯대에 연결된 낚싯바늘의 미늘을 모두 제거하였다. 며칠 후 미늘을 제거한 바늘로 낚시를 하면서 30cm 남짓 되는 잉어 2마리와 20cm 남짓 되는 붕어 몇 마리를 잡아 바늘을 빼고 바로 놓아 주었는데 바늘을 뺄 때 쉽게 뺄 수 있고 상처가 크게 나지 않아 좋았다. ‘이렇게 편한 데 왜 지금까지 미련하게 미늘을 사용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 삶에도 곳곳에 수많은 미늘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늘 없는 낚시를 상상도 하지 못했듯이 예전부터 해왔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답습하는 관행, 민원인과의 관계, 수용자와의 관계, 직장동료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등 우리 생활주변 곳곳에 보이지 않는 미늘이 존재하고 있으며 좋은 의미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욕심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규제로 표현되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고자 하는 나쁜 마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미늘을 제거한다는 것은 한번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10여 년 전 내가 J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던 친지를 접견했을 때 2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J교도소에 도착해 30여분의 대기시간 끝에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동안 접견을 하고 민원실에서 영치금과 접견물을 넣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허전한 마음은 민원인의 입장이 되기 전에는 전혀 몰랐고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었다. 접견시간이 짧다고 말하는 민원인들을 단순히 불평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하고 무시했었는데 내가 직접 민원인의 입장이 되어 10분여의 접견을 위해 5시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고 돌아오면서 허탈하고 서운한 마음을 가슴 속 깊이 느낀 후에야 비로소 민원인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미안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민원인의 불편함을 직접 겪어보고서야 미늘을 제거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나이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안다고 했는데 나는 나이 오십에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보다 미늘을 제거함으로써 상대방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것, 이것이 바로 지천명(知天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슴 속 깊은 곳에 새겨지고 있다.
다음 주에도 나는 동네 하천에 나가 한 시간 정도 잠깐 머리를 식히면서 낚싯대를 담글까 한다. 한편으로는 낚시를 한다는 그 자체가 물고기를 괴롭히는 것이라는 죄책감도 들지만 미늘을 제거한 낚싯바늘을 쓰는 것, 그것이 내 일말의 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