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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와 사랑 Sep 03. 2022

교도관 입문기

  1988년 정읍에서 양계를 하는 이모부 댁 일을 도우며 정읍에서 터를 잡아 축산을 하려 했으나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고 우리나라에서 축산이나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것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에 1990년 외삼촌 양계장 일을 도우며 내 몫의 가축을 키우다 저녁에는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는데 교정직 특채 공고가 보여 자세히 보니 전주교도소에서도 인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가축을 키우며 저녁에 독서실에서 몇 달간 공부를 해서 전주교도소 교정직 9급 시험에 응시했고 90점을 넘겨 무난히 합격하리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다른 지역에선 안정권인 점수였는데 불균형한 지역발전으로 인해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에는 큰 공장과 사업체가 거의 없어 공무원 시험 커트라인이 타 지역에 비해 높았던 것이다.


  정읍에서 생활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91년 어머니가 아프시고 집안에 우환이 들어 가족들이 매달 돌아가며 다치는 일이 계속 발생했다. 나는 장남으로서 불효한 지난 세월을 반성하며 어머니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읍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니 천만원 조금 넘는 돈이 손에 주어졌고 어머니 병원비에 보태 쓰시라고 드렸다. 다행히 어머니 병환은 괜찮아졌으나 내가 문제였다. 

  

  ​가진 것 없는 고졸 출신으로 뚜렷한 직장도 없이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촌누나 시장일, 사촌 형 공장일을 가끔 도와주고 용돈이나 벌어쓰며 생활하며 방황하던 차에 원주교도소에 다니던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아마도 9월 말이었던 것 같다.


  11월 초에 교도관 시험이 있는데 응시하라는 것이었다. 한 달 조금 넘게 남아 어렵지 않겠냐? 고 대답하자 전주교도소 시험칠 때와 과목이 똑같으니 공부해 둔 게 있으니 가능성 있다고 말하며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응시해 보라는 것이었다. 천안소년교도소가 나와 잘 맞을 것이라고 그곳으로 원서접수를 하라고 하여 시험이 언제냐? 고 물어보니 11월 9일이라고 하였다. 11월 9일은 여동생 결혼식 날인데 안된다고 말하자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은 여동생이 결혼식 참석보다 오빠가 잘되는 게 우선이니 결혼에 개의치 말고 시험에 응시하라는 것이었다. 옆에서 듣고 계시던 아버지어머니께서시험을 보라고  말씀하​셔서 생각해보니 9급 시험 연령제한이 29세였던 때라 마지막 주어진 기회라 원서접수를 하고 시험공부를 하는데 부담감이 커 코피가 터지도록 책을 보았다. 내 평생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은 없었다.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였고 1992년 1월 천안소년교도소 교도관으로 임용되었다.

  내가 여동생 결혼식 때문에 시험에 응시하려 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남동생이 군대에서 휴가 나와 미복귀하여 몇 달 지났는데도 어디 있는지 소식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빠와 동생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던것이다.


교도관 생활, 특히 소년교도소 교도관 생활은 내 적성에 맞았고 지금도 나는 친구와 여동생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비록 실패했지만 정읍에 있을 때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해 준비했기 때문에 한 번의 실패 뒤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성취하려 노력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오고 하늘이 도와주신다고......


  ​군대 제대하고 29살까지 공장, 인쇄소, 도서대여점, 농장 생활, 그리고 이곳저곳 알바를 하며 방황했던 세월들이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내 인생의 아픈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야기할 때 소년수용자들이 공감하고 받아들이고 내가 하는 말을 신뢰하며 잘 따랐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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