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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와 사랑 Sep 04. 2022

SOFA 영치 청소부와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

  92년 1월 보안과에 발령받은 후 총무과에 나가기 전까지 2년 동안 나는 소년수형자들과 생활하는 게 정말 보람 있었다. 그래서 보안과에 있기를 원했으나 직업훈련과 선배들이 자꾸 나오라고 하기에 안 나간다고 고사했더니 직업훈련과장이 찾아와서 혼내는 것이었다. 생각해서 나오라고 했더니 왜 자꾸 안 나온다고 하며 화를 내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간다고 했는데 막상 인사이동일에 직업훈련과 명단에 보니 내 이름이 없었다. 잘 됐다 싶어 야근한 다음날이라 퇴근하기 위해 이발소에서 씻고 있는데 방송으로 나를 찾는 것이었다. 어떤 모종의 사건(?)에 의하여 직업훈련과는 다른 사람이 나가고 나는 총무과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속으로 '웃기는 일도 다 있네 누가 총무과 내보내 달라고 했나?'라고 생각하며 총무과로 갔더니 영치품으로 발령을 내었다.

교도관 들어오기 전 이런저런 일들을 해봐서인지 영치품 업무가 바쁘긴 했지만 힘들진 않았다. 그럭저럭 무난하게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하루는 보안과장이 나를 부르더니 SOFA 수형자를 영치 청소부로 데리고 있을 수 있냐? 고 물어보았다. 나는 영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미국인 수형자를 데리고 있을 수 있냐고 반문하자 그건 상관없고 그동안 SOFA 수형자들이 사동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있어 공장으로 출역을 시켜야 하는데 다들 안 받는다고 하여 마땅한 곳이 없어 물어보는 것이라고 하여 그럼 내가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2명의 SOFA수형자를 데리고 다녔는데 처음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 사람들의 문화가 윗사람들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것에 대해 자꾸 의문을 제기하였다.


 예를 들어 영치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복도를 지나가다가 멀리서 소장이나 과장이 오시면 잠시 다른 곳으로 피했다 가곤 했는데 이때마다 이놈들이 나를 "닭고기"라고 놀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닭고기"라고 하느냐? 고 물어보았더니 미국에서는 비겁하게 숨으면 닭고기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후 소장이나 과장이 순시 오시더라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쳐 인사를 한 후 지나가곤 했는데 격려보다는 지적이 많았던 시절이라 그렇게 다니는 것이 내게 좋을 리 없었다.


  한 번은 영치품 때문에 SOFA수형자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이놈들이 SOFA수형자 편에서 SOFA수형자들과 함께 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내일부터 안 데리러 올 테니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 나를 붙잡더니 티쳐 왜 그러냐? 며 따져 물었다. 나는 니들이 영치청소부면 SOFA수형자들이 나를 공격할 때 영치 규정에 의해 불허라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나를 공격하니 사동에나 처박혀 있으라고 하였더니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며 다음부터는 티쳐 편을 들을 테니 화를 풀라고 하였다.(SOFA수형자들은 나에 대한 호칭을 티쳐(TEACHER)라고 하였다.


  그 사건이 있은 후 SOFA수형자들에게 영치 규정에 어긋나는 물품이 오면 그들이 알아서 불허 사유를 설명하고 내게 주곤 하였다. 나에게 심하게 대드는 SOFA수형자를 데리고 가 벽에 몰아세우며 혼을 내주기도 했다. 2년여의 세월을 그렇게 함께 했던 2명의 SOFA수형자는 내 교도관 생활중 잊을 수 없는 수형자들이다. 둘 다 징역 15년형을 받았는데 그중 G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팔에 한국인 여자 이름이 새겨 있어 누구냐? 고 물어보자 아내라고 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G가 하루는 내일 쉬어야겠다며 못 나온다고 하였다. 내가 네 맘대로 쉬냐? 며 안된다고 했더니 내일이 아내가 죽은 날이라 쉬고 싶다고 해서 그럼 쉬라고 한 후 녀석의 사건 내용을 보니 동거하던 한국인 여자가 한국인 남자와 결혼한다며 헤어지자고 하자 홧김에 목졸라 죽여 징역 15년형을 받은 것이었다.


 G는 감성이 풍부하여 덩치도 큰 놈이 눈물을 자주 보이곤 하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울고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고 울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끔 전화는 허용되었지만 미국에서 접견도 한번 없었고 가족들 얼굴도 한번 못 봤다고 하며 가족들이 보내온 사진을 보곤 했다.


 G를 생각하면서 2007년 외국에서 화상으로 통화할 수 있는 "인터넷 화상접견" 그리고 "화상공중전화" 전화 도입을 제안하였지만 교정본부에서는 내 제안을 불채택 하고 몇 년 후 스마트 접견이라는 변형된 제도로 시행하였다.

 10여 년 전 어느 날  G가 갑자기 나에게 격렬히 따지며 항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G가 영어로 한국을 계속 욕하기에 내가 화를 내며 조용히 하라고 하자 자신과 함께 있는 SOFA수형자가 살인을 저질렀는데 1년밖에 안 살고 나간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15년을 사는데 왜 그는 1년 만에 내보내느냐? 고 하며 자기도 내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네가 잘못 알고 있겠지?

검사가 잘못하겠냐? 고 말하자 한국 판사, 검사가 또라이라는 것이었다.


  G의 얘기는 이러했다.

자신과 함께 sofa 사동에 있는 SOFA수형자 F가 손등에 새겨진 문신을 보여주며 자신은 미국 갱스터(조직)이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1년여 전 햄버거 가게 살인 사건이 자신이 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그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 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며 G의 말을 묵살하였지만 G는 자기 말이 사실이라며 퍽킹 코리아를 연발하였다.


  며칠 후 G가 출소시켜서는 된다고 말했던  SOFA수형자 F출소하여 미국으로 갔고 몇 달이 지난 후 시사프로그램에서 G가 말한 사건이 구체적으로 방송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이었다. 이태원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던 대학생이 살해당하는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범죄현장에 두 사람이 있었고 최초에 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었는데 1심과 2심에서는 유죄였으나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증거(흉기) 은닉죄로 1년인가를 살고 출소하여 미국으로 갔다는 내용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었다.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범죄현장에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분명히 범인이든지 2명이 공범이어야 하는데 한 사람은 무죄, 한 사람은 다른 죄로 형을 받아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없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나는 그때서야 G가 왜 내게 그렇게 한국을 또라이라고 욕하며 떠들어 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G가 범인이라고 했던 F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송환되어 20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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