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냐고 묻는 당신에게

가치 있게 쓰이지 못하는 영혼은 0칼로리 노동에도 지친다

by Agri MSG

최근 한 동료가 무거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요즘은 동기부여도 안 되고 집중도 안 돼서 일을 많이 안 하는 것 같은데, 왜 갈수록 피곤해질까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며 격한 공감이 밀려왔다.


사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건 몸의 고단함보다, 내 에너지가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더 많이 영향받는다. (재밌는건 하루 종일 해도 지치지 않는 게 그 이유일 테다)


뻐근해진 가슴은, 그런 무력감을 느꼈던 과거의 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주어진걸 당연히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으로의 진학을 그렇게 ‘으레 해야 하는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나보다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들은 발에 치이듯 널렸다는 것은 학부시절에 이미 알았었다.

사실 그것보다도 멀지 않은 내 미래가, 거의 예외 없이 그 세계에 사람들과 같아질 거라는 걸, 그리고 그 모습이 내가 바랐던 모습이 아니다는 걸 어느 순간 알아버렸다.


물론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와 가슴에 가득 찰 때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여하튼 내 삶에 처음 무력감을 느꼈을 때를 떠올리자면 그때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부터 난 갈림길에 섰을 때 스스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래서 내가 선택할 다음 길은 무엇인가?


사실 첫 번째 질문 앞에서 늘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잘한다고 자신할 수 있는 건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 '잘한다'는 기준은 늘 상대적인 것이라,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신기루처럼 변하기 마련이니


다만, 명확히 알게 된 건,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스스로 선택했을 때, 그 목적지에 닿기 위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은 다음에 자세히 써봐야겠다)


즉,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중요한 길목에서 내 선택의 기준은 바로 "가치 있는 일에 내가 가치 있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때로는 남이 생각하는 가치와 내 기준이 부딪힐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내 안의 나침반을 믿고 선택했다. 선택이 쌓이면서 (즉 내가 무력감을 느끼는 경우의 수가 쌓이면서) 난, 주도적으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는 환경을 극도로 견디지 못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동료가 느꼈던 그 지독한 피로감의 정체도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자신의 가치가 주도적으로 쓰이지 못하고 타인의 요구에 마모될 때 느끼는 피로감.



물론 현실적인 물음은 남는다. "인간이 살면서 어떻게 매번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일만 하며 살 수 있겠어?"라는 반문.


사실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은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이 예쁘게 포개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해야 하는 것'의 비중이 압도적인 삶을 버텨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집중하는 건, 8할이 '해야 하는 일'일지라도, 그 안에서 단 1할이라도 '나만의 가치'를 발견해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남이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이 고된 과정이 결국 내가 지향하는 어떤 가치로 연결된다"는 주체적인 해석이 개입하는 순간, 그 일은 더 이상 나를 갉아먹는 소모가 아니게 된다.


우리가 삶을 버티는 힘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만한 최면을 거는 능력에서 나온다. 아무리 사소한 업무라도 나의 주도적 가치 판단이 한 방울 섞일 때, 비로소 우리는 부속품이 아닌 '주인'으로서 에너지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난, 오늘도 그 막막한 상황들 안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세상이 정해준 비율에 나를 맞추지 말자. '해야만 하는 일'들로 가득한 오늘일지라도, 그 틈새에서 내가 가치 있게 쓰일 단 하나의 이유를 찾아낸다면, 나는 결코 소진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이 더 이상 납득이 안되는 순간일 때, 또 선택의 시간이 왔다는 거겠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팀장님, 힘든 거 다 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