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주간 일어난 일

by 거북이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아니라, 다사다난했던 '지난 3주간'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 봅니다.


올해 1월 예산부서 예산편성팀으로 발령받아 난생처음 추경예산을 편성해 보았습니다. 저에게 무척 도전되는 일이었습니다. 20년동안 사업부서에서 '융통성 있게 대략 눈치껏 일처리를 해오던' 저의 일습관과 그 방식이 예산부서에서는 통용이 되지 않아 된통 깨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과장님은 작년에 예산부서내 다른 업무를 맡았을 때부터 익숙했던 분이라 이제는 어떤 말을 해도 그냥 '우리 과장님 참 귀여우시다'로 들립니다.


'에효(한숨) 자네 때문에 흰머리가 느네' 라든가 '일을 이렇게 하니, 내가 일하는 재미가 없네' '자네 경력이 얼마나 되는데, 이런식으로 밖에 일이 안되지?' 라든가 하는 말들이 (말씀한 보람도 없이 죄송스럽게도?) 이제 영향이 없습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죄다 돌아가며 들었던 말들이라 일종의 패턴과 레파토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말씀은 저렇게 하셔도 정의감에 불타 일하시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과장님은 '잘못되었다면 그걸 알 수 있도록 알려줘야지 가만 놔둬요?'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봄에 경북 산불이 전국으로 번져나갈 당시, 비상근무로 주말출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직원들이 웅성웅성일 때 '부끄러운줄 아세요. 관련 부서에서는 일주일째 집에도 못가고 있는데' 라며 호통 치신적이 있으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며 자식에게 상처주는 말을 했더라도 자식도 언젠가 부모가 되어 그 시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안에 사람을 향한 사랑과 선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팀장님과 저는 처음 근무를 하는 사이라 서로에 대해 잘 모릅니다. 성격도 달라서 MBTI로 말하자면 극J와 극P의 만남 같은 것입니다 (극J는 팀장님, 여행전 10분 단위로 계획을 세운다면 극P인 저는 계획 따윈 여행에 방해될 뿐, 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팀장님은 제가 출근하고 2,3일 뒤 저를 따로 부르시더니 '이 팀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개인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시전에 출근해야 간부님 회의에 과장님 자료를 챙겨드릴 수 있는데 제가 8시 30분에 출근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그동안 일습관은 '아, 그건 오타입니다. 수정하겠습니다' 라든가, '(그 질문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으니) 알아보고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가 장착된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팀장님은 예산부서에서 경력이 많으시고 뼈를 묻으셨던 분이십니다. 엉성하고 미덥지 못한 부분이 한눈에 보였을 것입니다. 제 경험과 눈높이에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질문들을 하셔서 저는 한계(머리)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습니다.


어느 부서에서는 예산편성 산출기초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적습니다. 원래 방침결재와 달라져서 이기도 하고, 부서에서 수없이 논의되면서 사업 담당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운영비 단가와 인건비 단가를 별도로 비교해야 하는데 그것을 한꺼번에 섞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분량이 많다보니 면밀히 체크하지 못했을 때 사업부서가 주장하는 논리로 휩싸여 제대로된 예산검토가 어려웠습니다.


보고서 분량도 압도적이다 보니 신체적인 물리적 한계도 있었습니다. 지난 3주간 야근과 토일도 없이 일해야 했고 심장이 계속 두근거리고 손끝이 저리며 무릎이 떨렸습니다. 최근 일주일 사이에는 머리가 어지럽고 두통이 생겼고 급기야 어제 그제는 설사증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고서에 자꾸 오타가 났습니다. 과장님께 보고가 있은 후에, 팀장님은 저를 또 따로 부르시더니 '왜 그렇게 집중을 하지 못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팀장님도 아시다시피 토일도 없이 계속 출근해서 일하고 있어 너무 피곤하고 평소 당뇨와 갑상선 문제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인듯하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과장님이나 팀장님이 화를 내시니 위축되었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팀장님은 '그래도 완벽하게 할 일을 해야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에 마음속으로 즉각 반응을 했습니다. 도대체가 정상적이지 않아 보였고 '말이 안되고, 틀린 것이다, 옳지 않은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 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말도 안된다. 아픈데도 완벽하게 일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다'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저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또 제가 진실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 이렇게 몸에 이상반응이 올 정도로 일하기가 싫은 마음을 말하지 않았는 것입니다. 형부가 스트레스로 돌아가시고 언니마저 현재 휴직을 낸 상태입니다. 두 사람은 회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이었고, 인생에 일이 전부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허무함이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요일 합동근무하고 월요일 아침 출근했을 때 옆에 주임님이 '퇴근하고 싶네' 라고 말했을 때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일의 재미를 알면, 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할 텐데. 왜 보통의 직장인들은 재미보다는 압박을 더 느껴야 하는 것일까요.


월요일 아침, 실장님 보고를 앞두고 또 한차례 긴장감이 돕니다. 팀장님은 보고서를 최종 점검하시면서 오타를 또 발견하시고 '내가 세 번이나 말했는데 왜 또 안고쳤지?' 라고 말했을 때 저는 암담했습니다. 저역시 내가 왜 그랬을까 이유를 알 수 없어 눈앞이 깜깜했거든요. 그런데 그 이유를 물으시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3주간 제가 느꼈던 것은 '압도되는 경험'은 사람을 굳게 만들고 유연한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있는데, 거기에 비난, 자괴감, 죄책감, 수치스러움 등이 동시에 뒤섞였을 때 저는 압도되었습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실제 미래는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데, 상황은 지금보다 점점 더 좋아질 수 도 있는데, 지금 이 압도되는 상황이 지속 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들을 적어봅니다.


1. 우연히 팀장님 역시 업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여도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해냈습니다.


2. 팀장님의 장점을 생각했습니다. 팀장님은 참 솔직한 사람입니다. 혼자 끙끙앓고 저를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본인의 속상한 마음을 말씀해 주시니까요. 웃는 모습도 너무 예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도 지금의 실수투성이 모습만이 아니라 앞으로 저의 장점을 살려 일을 멋지게 해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3. 과장님 업무보고 이후, 예산편성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걱정하던 한 꼬맹이 직원에게 과장님 심의가 통과했다고 메일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항상 세심히 챙겨줘서 고맙고, 요 근래 들어 가장 기쁜 소식이라 감사하다' 는 문자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 문자메세지 한통에 좋은 선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깨어났습니다.


4. 인사계 직원 한 분이 요즘 힘들지 않냐고, 거기 일이 본인도 해봤는데 보통이 아니라고 힘내라, 고 회사 메신저로 말을 걸어 주었을 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5. 그리고 본예산은 추경예산의 10배라고는 하지만... 당장의 추경 지옥의 시간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실무선에서의 일이 마무리 되고 윗선에서 어떤 예산을 넣고 뺄지 고민하는 때가 다가옵니다. 한숨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두통이 사라집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옥의 맛을 본 것 같은 3주간... 참새 새끼 한마리가 창공을 질주하는 독수리들과 같이 날아야 했던 느낌을 실컷 받았습니다. 하지만 배우고 반성한 부분도 많습니다. 숫자 하나에, 0하나에, 기호하나에 얼마나 영향이 클까를 생각하니 더 세심해져야 겠습니다. 통계자료집을 만들거나 관련 자료를 스크랩 해놓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언젠가 일에 익숙해져서 비록 재능은 없지만, 그럭저럭 해내는 수준은 되지 않을까를 기대해봅니다. 뭐, 당장은 뼈가 저리지 않게 뼈를 튼튼히 하기 위한 운동부터 해야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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