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다

마음의 자유와 말의 자유를 꿈꾸며 (1)

by 거북이


'나에게 오라.

너희 지치고, 가난하고

자유롭게 숨쉬기를 갈망하는

마음의 자유와 말의 자유를 꿈꾸며

버림받은 비참한 이들이여'


‘천자칼럼’을 읽던 중에 자유의 여신상 받침대에

이와 같은 글이 적혀 있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자유를 꿈꾸는 이들이 뉴욕으로 모여드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도 같습니다.


아이를 내버려둔 채 PC방에 가는 철없는 엄마 아빠들은

육아에서 해방되어 ‘게임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를,

‘나만 없어’ 라고 외치며 소비하고 소유하고 싶은 이들은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최근 두어달 동안, 아침 8시부터 밤 11시,12시까지

컴퓨터를 노려보며 일했던 저는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꿉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유로 자유를 꿈꿉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디폴트값입니다.

모든 기대와 바람들이 자유를 꿈꾸게 합니다.


특히, 자유의 여신상에 적혀 있는

‘마음의 자유와 말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음은 분명 내 속에 있는 나만의 것임에도

마음이 짓눌려 무거워 질 때가 있습니다

분명 내 속의 마음은 외부에서 온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온 것들은

‘~해야 한다’라는 사회의 통념, 문화, 교육, 윤리와 도덕 같은 것들입니다. )


마음의 자유와 한 세트로 구성 된 것이 ‘말의 자유’인 듯합니다.

마음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말할 자유마저 세트로 허락되지 않을것입니다.


최근 회사에서 겪은 ‘말과 마음의 자유가 없었던 사건’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사장님이 탐탁치 않아 했음에도

그 부서 과장님과 직원분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방팔방으로 설득하러 다니신 끝에

사업 하나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부서 과장님께서는 고맙다며 예산부서에 근무하는 우리들에게 피자를 쏘셨지요

먼저 그 사업 담당 직원분이 전화로 ‘피자 주문하려고 하는데 괜찮지요?’ 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순간 제 옆자리 직원이 전화통화 내용을 듣고 ‘에그 타르트를 먹고 싶다’고 말했지만

간식을 보내준다는 부서에서 이미 가격 등을 고려해 ‘피자’를 말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피자 말고 에그타르트로 보내 주세요’ 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피자 배달이후 2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과장님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 못하고

여기저기 회의와 보고로 인해 분주했습니다.

직원들도 과장님 지시에 의해 자료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차라리 에그타르트가 나을뻔했습니다.

회의실에 덩그러니 배달되어온 피자는 에어컨 냉방으로 인해 딱딱하게 식어버렸습니다.

더군다나 그 피자는 녹차와 클로렐라로 반죽했다는 건강피자였습니다.

딱딱하게 식어버린 건강피자는 약 20년전의 기억까지 불러일으켰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지금은 점심시간 문을 닫습니다만) 점심시간에 일보러 온 고객을 응대하느라

제 때 먹지 못해 우동처럼 불어버린 컵라면 면발과

퇴근 후, 쓰레기통을 대신 비워주다가 발견한

포장상자째 쓰레기통에 내던져 있던 도장이 생각났습니다.

같은 곳에서 일하는 입사동기에게 승진 기념으로 선물했었지요

그리고 입사동기의 개죽이 같이 순한 인상으로 웃는 표정이 덤으로 떠오르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 백해무익한 순한 미소로 늘 저를 대했지요...

냄새마저 다 식어버린 피자의 맛은

씁쓸한 기억의 맛입니다.


선물한 사람도, 선물을 받은 사람도 모두가 탐탁치 않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버린 피자.

‘피자 말고 에그타르트로 대신 주세요’라고 정녕 자유롭게 말할 수는 없었는지 씁쓸하게 되돌아봅니다.



[천자칼럼] 자유의 여신상 '가정법’

2025.3.19.

“이건 단순한 장사 이상이었다. 젊은 일본인 부부와 사교를 맺을 기회였다.” 1962년 출간된 필립 K 딕의 소설 <높은 성의 사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승리해 미국을 분할 점령한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소설 속 일본 점령하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골동품상 칠던은 ‘눈이 유난히 까만’ 일본인 부부가 매장을 찾자 ‘지배 민족’에게 잘 보일 기회로 여겨 한껏 들뜬다.


‘완료된’ 역사에 ‘만약에’라는 가정을 붙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쉬운 과거를 바꾸면 초라한 현재의 모습도 단박에 빛이 날 것만 같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으면 세계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란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표현이 공감을 얻는 이유다. 전제를 바꾸면 세상에서 ‘당연한’ 일도 찾아볼 수 없다. 소설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에 붙은 ‘경성(京城), 쇼우와 62년’이라는 부제는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얼마나 어렵게 얻은 결과물인지를 서늘하게 전한다.


프랑스가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을 소재 삼아 때아닌 ‘역사 가정법’ 논쟁이 벌어졌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그제 ‘자유의 여신상’을 돌려달라는 프랑스 정치인의 주장에 대해 “절대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며 “지금 프랑스 사람들이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오직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덕분”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휴전 협상에서 배제한 미국을 향해 ‘자유의 여신상이 담고 있는 자유의 가치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공격적으로 답한 것이다. 그러자 당장 ‘프랑스가 미국 독립을 돕지 않았으면 미국은 여전히 영국 식민지일 것’이라는 식의 비아냥이 쏟아지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자유’라는 인류의 염원을 담은 상징물이다. 여신상 받침대에는 “나에게 오라. 너희 지치고, 가난하고/자유롭게 숨쉬기를 갈망하는/버림받은 비참한 이들이여”라는 시구가 적혀 있다. 이 여신은 미국과 프랑스의 입씨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자유진영 연대를 계속 훼손하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고운 시선을 보낼 것 같지는 않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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