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인간은 가면을 쓰는 순간, 가면처럼 살게 돼

이중 생활 그리고 바람직한 주변 친구들과 사귀게 할 것

by 거북이

사랑하는 나의 조카 웜우드에게.


네 '환자'가 드디어 아주 바람직한 무리에 발을 들여놓았더구나


지옥의 서재에서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차갑게 미소 짓습니다.


그는 인간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가장 우아한 방법은

세련된 농담과 허영심 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제 청년 실라스의 영혼을 잠식할 교묘한 계획이 종이 위에 펼쳐집니다.


실라스는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화려한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독실한 그의 어머니 엘리너가 정성껏 준비한 저녁 식사 시간,

그녀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실라스의 표정은 어둡기만 합니다.

그는 어머니의 믿음이 오래된 구식이고 따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라스는 성경책 대신, 화려한 파티의 초대장이 담긴 봉투를 펼칩니다.

마침내, 실라스는 줄리안을 만납니다


줄리안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가

베스트셀러 책도 여러 권 낸 유명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세상의 허점을 비웃는 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화려한 펜트하우스 파티에서 줄리안은 실라스에게 샴페인 잔을 건네며 속삭입니다.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도덕에 얽매여 있나?

시대가 변했네.

지적이고 성숙한 사람이라면 선악 따위는 농담으로도 여길 수도 있어야 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실익이 있는지 균형있게 볼 줄도 알아야 하고.

게다가 진짜 악이라고 생각한다면 불굴의 의지로 깨부숴야지"

실라스는 줄리안의 말이 세련되고 멋지게 들렸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습니다.

스크루테이프는 이 광경을 지켜보며

조카 웜우드에게 다음 단계를 지시합니다.

"보아라, 웜우드. 실라스가 얼마나 우쭐해하는지!

줄리안 같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진보적인 지식인'인 척하고,

교회에 가면 '경건한 신자'인 척하게 만들어라.

철저한 이중생활에 더 빨리 길들일수록 우리에게 유리하지"


웜우드는 삼촌의 지혜에 감탄하며 실라스의 우쭐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요일 아침, 실라스는 평소처럼 교회에 앉아 있습니다.

옆자리에는 일평생 성실하게 야채가게를 운영해 온

타데우스가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실라스는 속으로 코웃음을 칩니다.


'저 불쌍하고 무식한 노인네

지금도 개미처럼 평생 일만 하면 돈이 벌릴 줄 아나?

나처럼 지적인 대화를 하고

고급 정보를 가진 이들과도 어울려야지'


실라스의 몸은 교회에 있지만,

그의 마음은 어젯밤 줄리안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리며

야채가게 주인은 절대 줄리안이나 자기같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격차를 떠올리며 허영심과 우월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다시 줄리안의 무리와 모였을 때, 실라스는 더욱 대담해집니다.

줄리안이 신앙과 도덕을 조롱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 진부한 신앙 말이야?

나도 어쩔 수 없이 참여하고 있을 뿐이야.

나이든 노모의 한평생 소원이 아들이 교회에 다니는 거라 하시니.

아들로서 무시할 수도 없고...정말 한심하지 않나?"

실라스는 줄리안과 그 무리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의 모습까지 깎아내리며, 정말이지 곤란하다는 듯 말합니다.

사실, 실라스의 머릿속에는

새벽마다 어머니가 어둠속에서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떠올랐고,

실라스 자신 역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기도하던 때도 있었건만

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실라스는 마치 연극배우라도 된 양 한 술 더 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줄리안과 그 무리들은 자신의 깊은 영적인 내면의 세계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실라스에게 어머니 엘리너가 걱정스러운 듯 다가와

오늘 성경 공부 모임은 왜 빠졌는지에 대해 묻습니다.


실라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붙입니다.

"어머니, 지금 시대가 바뀌었단 말이에요.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얘기 좀 그만하세요.

저는 이제 더 수준 높은 모임에 가야 한단 말이에요

평생 조그만 야채가게나 하던 노인네들과 어울리면

나도 그 수준에 머무르고 말꺼에요"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슬픔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실라스는 그녀를 외면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실라스는 이제 자신이 특별한 인물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교회에서는 줄리안 같은 상류층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으쓱해지고

운이 없고 아직은 때가 아니어서 그렇지,

사실 자기가 줄리안과 그 무리들보다

영적이며 종교적인 깊이까지 갖춘 우월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의 그는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오직 불완전한 우월감만 남은 빈 껍데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세련된 미소를 연습하지만,

가면으로 가려진 진짜 얼굴은 도통 보이지 않습니다.

"좋아! 아주 훌륭해!" 스크루테이프가 환호하며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이중적인 위선자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어.

스스로를 '다양한 매력을 가진 지식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웜우드야,

인간이 자신의 진짜 얼굴을 잊고 가면을 쓰는 순간,

반드시 그 가면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된단다.


허영심, 수치심, 자존심 같은 것들을 잘 건드린다면 식은죽 먹기지.

지연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환자의 진심도 진실에서 멀어질 테지

말을 해야 할 때는 침묵을 지키고

침묵해야 할 때는 웃어 버리겠지

그리고 마침내 우리 식탁 위에 오르게 될테지"

스크루테이프는 만족스러운 듯

웜우드에게 실라스의 일상을 허공의 화면에 보여줍니다.

실라스는 여기저기 금이 간 깨어진 거울 앞에 섰습니다.

자기 월급보다 훨씬 비싼 고급옷을 입고 세련된 말투를 구사하지만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실라스의 진짜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서로 다른 수십 개의 얼굴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어느편에도

진실하지 못했던 이중적인 삶의 끝에서

실라스는 이곳저곳 흩어진 공허함과 마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keyword
이전 09화9. 진실을 과거로 만드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