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다리 아래의 잿가루
사랑하는 나의 조카 웜우드에게.
전쟁이 잠잠해진다는 소식에 네가 맡은 인간 앵거스의 불안감도 진정되고 있다고? 앵거스를 더 깊은 불안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곧 전쟁이 끝날거라는 희망에 들떠 있게 하는 것이 나을지 고민이라고? 우리로서는 둘 다 더할나위 없이 멋진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뭐가 더 나은지 한번 들여다 보자꾸나.
원수는 인간의 주된 관심을 영원 그 자체와 현재에 집중시키려 하지. 원수는 인간이 현재에 머물며 자신이 할 일에 집중하고 그러면서 영원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인간은 현재의 순간에만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우리의 임무는 인간을 '영원'과 '현재'로부터 떠나게 만들어야 해.
애석하게도 과거는 ‘이미 확정된 사건’ 으로서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변의 진리와 영원’과 닮아 있지. 인간은 과거를 돌아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진리를 발견할 수도 있어. 그러니 인간이 과거에 파묻혀 살게 하면서 영원과 현재로부터 떠나게 하는 수법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지.
‘객관적이고 확실한’ 과거보다야 ‘환상과 미지’의 미래에 붙들린 인간을 바라보는 것을 정말 즐거운 일이란다. 더군다나 거의 모든 악은 미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사는 과거를 바라보고, 사랑은 현재를 바라보나 ,두려움과 탐욕과 정욕과 야망은 앞을 바라보지.
물론 원수도 인간이 미래를 생각하기 바라지. 다만 지금 딱 필요한 만큼만 생각하길 바라지. 원수의 이상형은 하루종일 후손들을 위해 일을 하고, 그 일의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맡긴 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지.
웜우드야, 그러니 너는 네가 맡은 환자의 마음을 미래로 보내버려야 한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며, 불안과 헛된 희망이 자라나는 비옥한 토양이지. 나는 네가 앵거스의 귀에 끊임없이 불안과 떨리는 미래를 주입하기 바란다.
저기 앵거스를 보아라. 그는 주말인데도 맘편히 쉬지 못하고 사무실에 나와있구나. 지금 자신의 눈앞에 놓인 상사가 지시한 과제들로 골머리를 앓고 한숨을 쉬고 있지. 하지만 원수는 그가 겪는 이 상황속에서도 생의 의미와 기쁨을 찾게 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방해해야만 해.
그의 어깨 뒤에 다가가 속삭여라. ‘내일까지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능력 없음을 증명하는 거야. 사람들은 비웃겠지’ 라고 말이다. 그가 문제해결에 집중하는 대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두려움을 상상하게 만들어라.
보아라, 미래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와 같다. 그것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반대로 아주 달콤한 환상을 가져다 주지. 인간이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그는 결코 현재의 자신으로 살 수 없다. 그는 이미 일어나지 않은 허상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앵거스의 떨리는 눈동자가 보이느냐? 아주 잘하고 있다.
만약 그가 공포에 질리지 않는다면, 전략을 바꿔라. 이번에는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는 거다. 그가 모두의 찬사를 받는 상상을 하게 해라. 지금 당장의 지루한 시간 보다는, 미래의 화려한 영광에 취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그는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내일은 더 괜찮아 질거야, 라는 달콤한 꿈만 꾸고 있지.
앵거스의 몸은 현재에 있지만, 그의 정신은 10년 뒤의 어느 시점을 떠돌고 있지.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렸다. 원수는 인간이 현재를 소중히 여기길 바라지만, 우리는 인간이 미래라는 허상을 쫓느라 현재를 낭비하기를 바란다. 그는 지금 현재 자기의 처지나 상황은 잊은 채 온통 미래의 환상적인 무지개 다리만 둥둥 떠다니듯 거닐고 있지.
기억해라, 웜우드. 인간이 미래에 대해 걱정하거나 희망을 품을 때, 그는 결코 진실할 수 없다. 두려움은 그를 압도하게 만들고, 헛된 희망과 기대는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리우고 자만하게 만든다. 오직 현재만이 그가 진짜로 행동하고, 진짜로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우리는 그 시간을 훔쳐야 한다.
자, 이제 앵거스를 보렴. 그의 손은 미래의 불안 때문에 떨리고, 미래의 망상 때문에 일에 집중하지 못했지. 우리의 작은 승리를 축하하자꾸나. 그는 현재라는 선물을 스스로 태워버리고 있다. 그는 결코 마음의 평안도, 행복도, 친절도, 정직도, 관대함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다 타고 남은 잿가루 만이 눈앞에 흩날리고 있을테지.
너를 무척 아끼는 삼촌, 스크루테이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