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71

숨겨진 자, 지워진 이름

by 강순흠


밤례는 벽보 아래 남겨진 글씨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다음은 너희 차례다.’

잉크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붉은 글씨는 살의처럼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날 밤, 밤례는 말없이 부엌 찬장 속 편지 뭉치를 불에 던졌다.
두석이 써둔 글, 아이들과 찍은 사진, 붓글씨 연습장까지.
불은 조용히 타올랐고, 한 점 먼지가 되었다.
“이젠, 여긴 당신 자리 아니야.”
밤례는 두석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두석은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밤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이 여기 남으면, 아이들부터 죽어.
나는, 당신을 살리고 싶어.
살아서, 나중을 준비해야지.”
그날 새벽, 두석은 밤례의 손에 이끌려 마을을 빠져나왔다.
달빛도 숨죽인 길 위,
두 사람의 발자국은 물가에서 끊겼다.
“고흥 금산으로 가요. 처가댁, 그 친척분 집.
한동안만... 이름도 쓰지 말고, 편지도 쓰지 마요.”
밤례는 그의 손에 작은 쪽지 하나를 쥐여줬다.
“필요하면, 이 사람 찾아가요. 우리 편이야.”
그리고는 돌아보지 않았다.
두석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밤례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바람이 옷깃을 밀쳐냈다.


며칠 뒤, 대한청년단 완도 분회가 다시 봉강정을 덮쳤다.
이번엔 경찰이 동행했다.
“강두석, 어디 있나?”
밤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년단은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서가에 꽂혀 있던 책을 던지고, 바닥의 상자를 뒤엎었다.
사진첩, 수첩, 심지어 벽에 걸린 족자까지 찢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 흔적, 왜 이리 깨끗해?”
“사진 한 장도 없어, 뭐지? 미리 정리했나?”
밤례는 입을 꾹 다문 채, 부서진 문턱 앞에 서 있었다.
경찰이 말했다.
“이건, 도피 방조다. 알지?
지금이라도 말하면 봐준다.”
밤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는 게 없습니다.”
그날 밤, 완도 읍내에 ‘수배 전단’이 붙었다.

『수배자 : 강두석』
좌익 잔존 사상 보유, 민심 교란 혐의.
발견 시 즉시 신고 바람.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어떤 이들은 고개를 돌렸다.
청년단은 벽보를 들고 다니며 외쳤다.
“숨기면 너희도 공산당이다!”
“강두석은 민족 반역자다!”
밤례는 그 말 앞에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밤마다 집 안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혹시라도 남은 필적, 쪽지, 물건 하나라도 발견될까 두려웠다.
마당의 대야 속에 담긴 교재를 찢어 물에 불리고,
나무 밑에 묻은 필통을 파내 불살랐다.
이따금 아이들이 찾아와 물었다.
“ 선생님은 언제 와요?”
밤례는 미소를 지었다.
“다음 봄에, 꽃 피면 오신대.”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겨울, 대한청년단은 밤례의 집 앞에 횃불을 들고 섰다.
“우린 끝까지 포기 안 해.
강두석 내놔. 이젠 너도 끝장이야.”
밤례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사람 하나 살리는 게... 나라 하나 지키는 일이라면,
나는 백 번이라도 숨길 거요.”
불빛이 사라진 밤,
밤례는 한 장 남은 벽보 조각을 꺼내어 다시 붙였다.

“우리는 인간을 지킵니다.
이름이 아니라, 숨결을.
깃발이 아니라, 사람을.”

#작가의 말
위험은 이념이 아니라
그 이념을 빌려 폭력을 휘두르는 손에 있었습니다.
밤례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사람의 이름까지 지워야 했습니다.
기억은 타버렸고, 사진도 찢어졌지만
사람의 온기만은, 그렇게 지켜졌습니다.
누군가는 싸우지 않고,
다만 지켜냈습니다.
그 지킴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용기 있는 저항이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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