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73

숨소리도 조용한 날

by 강순흠


움막 속은 여전히 축축했다.
땀인지, 흙수인지 모를 물기가 등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두석은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아니, 팔을 베는 것도 사치 같아 이마를 손등에 얹었을 뿐이었다.
바깥은 조용했다.
그런데…
그 ‘조용함’ 속에서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죽음의 발자국 소리.
어느덧 그 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그는 그걸 ‘외면할 수 없는 손님’이라 불렀다.

"문맹을 없애겠다고 했지.
아이들 손에 연필을 쥐어주겠다 했고…
농부의 등을 곧게 펴게 하겠다 했는데…"
조국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통일,

인간존엄은...
이제 이루지 못한 꿈이련가...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도 없고, 별도 안 보이는 그 위를.
꿈이었는지, 망상이었는지 모를 장면들이
깜빡이는 영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검정칠판 위에 분필로 쓴 ‘조국’라는 글자,
봉강정 마당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농민들,
‘조선’이라는 단어를 말하자
눈물 짓던 노인의 얼굴.
"그게 모두 흙 속에 묻혀버린 걸까…
아니면, 아직 남아 있으려나…
누군가의 마음속 어딘가엔…"
그는 문득 아들 군수를 떠올렸다.
동생 화덕이 웃으며 밥상을 차려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밤례가 술기운에 눈시울 붉히며 그의 흉터를 쓰다듬던 밤도.
“난 그들 곁에 있어야 했는데…
살아도 같이 못 있고, 죽어도 눈 감지 못하겠구나.”

조국, 그 불안한 이름
움막 안에서 듣는 바깥 세상은 기괴했다.
이따금 들려오는 청년단 발자국,
험한 욕설,
그리고 정오가 되면 읍내에서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
“적색분자 색출!
국부정통을 흔드는 잔재 청산!”
그는 혀를 깨물 뻔했다.
무언가 외치고 싶었지만
그는 아들이, 밤례가, 마을 사람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한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조국을 사랑했지만
조국이 그를 미워하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왜 조국은,
자기를 사랑한 자들을 이리도 잔인하게 내모는가…”

그는 이제 익숙해졌다.
어둠에.
배고픔에.
고요함에.
그러나 단 하나,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무의미함’이었다.
“나는 그냥 숨는 것이 아니다.
견디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얼굴을, 역사의 끝을,
두 눈으로 보겠다는 악심이다.”
그의 숨소리는 여전히 가늘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내면은
여전히 뜨거웠다.
“죽음이 오더라도…
난 그 녀석 눈을 정면으로 보겠다.”
그날 밤, 그는 오랜만에 펜을 잡았다.
움막 구석에 숨겨둔 연필 한 자루와
습기를 먹은 작은 쪽지.
그는 거기에 단 한 문장을 써 내려갔다.
“살아서, 기억하겠다.
말이 사라진 시대에, 나는 침묵으로 말하겠다.”

#작가의 말
숨는 삶은 도망이 아니다.
그건 역사의 관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치열한 저항이다.
두석은 움막 안에서
자기만의 전쟁을 하고 있다.
그의 무기는 총도, 칼도 아니다.
기억이고, 사랑이고, 사명이다.
그는 지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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