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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개나리 7

밤의 등불

by 강순흠

" 문화통치기의 그늘 아래, 희망을 심다"

1930년 가을, 금당도.
은행잎이 노랗게 흩날리는 날, 폐허가 된 옛 서당 앞에 두석이 섰다. 낡은 기왓장이 반쯤 무너지고, 바람에 들썩이는 문짝은 마치 시대의 폐허를 상징하는 듯했다.
"이곳이 다시 시작될 자리요."
두석의 말에 따라 들어선 격섭은 먼지를 툭툭 털며 코웃음을 쳤다.
"선생님, 이런 데서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 비도 새고, 창호지는 누더기요."
두석은 조용히 창틀을 닦으며 말했다.
"이곳이 마을의 혼을 지핀 자리요. 밤마다 등불을 켜고, 글을 가르칠 것이오."
"이 시대에 글이 밥입니까? 지금은 일제가 학교도 지어주고, 조선어도 가르친답디다."
격섭의 말에 두석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답했다.
"그건 껍데기뿐인 문화요. 겉으론 조선을 존중한다지만, 실상은 우리의 혼과 말을 깎아내리는 칼질이지. 진짜 교육은 식민의 족쇄를 부숴야 하네."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정희가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안엔 헌책 몇 권과 감색 천조각들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께서 남긴 훈민정음과 동의보감입니다. 여자들도 뭔가 해야 한다고요. 재봉을 가르치겠습니다."
두석은 감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의 각성 없이는 민족의 해방도 없습니다. 당신들 손이 조선의 살림을 지킬 터요."

겨울밤, 서당 안은 장작불로 데워졌다. 열댓 명의 청년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두석이 독립신문 복사본을 나눠주며 말했다.
"이 글이 칼이요, 방패요, 불꽃이오.
외워봅시다.
'독립은 민족의 생명이니라.'"
청년 기동이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 독립을 외운다고 밥이 생깁니까? 우리 아버진 오늘도 소작료 때문에 울고 계십니다."
격섭이 일어섰다.
"네 아비가 왜 땅을 빼앗겼는지 아냐? 글을 몰라 일본서기에 속아 도장 찍은 거야! 이 글이 바로 너희 주먹이야!"
그때, 문이 쾅 하고 열리며 일본 순사 소헤이가 들어섰다. 그의 칼자루가 촛불을 스쳤지만,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모임이오? 조선의 서당이 아닌 무허가 집회 같군."
두석은 담담히 웃었다.
"허름한 시골 글방이오. 농사꾼들이 시조나 읊는 취미방이지요."
소헤이는 정희를 흘겨보며 말했다.
"여자가 남자들과 공부라니, 일본 황국의 미풍양속과는 사뭇 다르군. 등불이란 바람 불면 꺼지는 법, 조심하게."
창밖으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순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총소리는 아니네요. 계속하시지요, 선생님."

봄. 야학 뒤뜰에 밭이 생겼다. 마을 청년 진우가 주머니에서 씨앗을 쏟으며 말했다.
"일본 놈들 면화만 심으라 하니, 우리는 콩을 심겠습니다. 우리 종자를, 우리 땅에."
학생들은 논둑에서 책을 읽고, 밤이면 토종 씨앗을 나눴다. 순이는 일본어로 된 농약설명서를 찢으며 말했다.
"이건 독이에요. 우리 황토는 우리 손으로 지켜야죠."

몇 달 후, 야학 학생들이 만든 『민중의 벗』이라는 소책자가 탄생했다. 붉은 잉크로 쓰인 제목 아래엔 다음과 같은 구호가 적혀 있었다.
“교육으로, 노동으로, 농업으로 독립을!”
물산장려운동과 자립협회 사례, 서구 계몽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이 담겼다.
소책자는 순식간에 주변 마을로 퍼져나갔다. 밤마다 땀과 잉크로 얼룩진 손들이 글을 배포했다. 순사들은 이를 ‘금서’로 규정했고, 두석은 조심스레 감추기 시작했다.

어느 밤, 서당 앞에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불빛이 흔들렸고, 격섭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놈들입니다."
두석은 정희에게 『민중의 벗』 원고를 넘기며 속삭였다.
"이건 너희가 지켜야 해. 불씨는 꺼지지 않게, 이어가거라."
문을 박차고 들어온 헌병은 두석을 끌고 나갔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 하나 반짝였다. 그 별빛이 서당 지붕을 비췄고, 여전히 안에는 등불이 꺼지지 않은 채 타오르고 있었다.


#작가의 말
문화통치기, 그것은 '유화정책'이라는 탈을 쓴 민족말살의 서막이었습니다. 야학은 단순한 교육의 장이 아니었습니다. 이름을 되찾고, 언어를 지키며, 뿌리 없는 세대에 희망을 심는 불꽃이었습니다. 꺼질 듯 말 듯 타오르던 밤의 등불은, 결국 민족의 영혼을 잇는 심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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